Description
사랑의 최소 단위는 ‘나’가 아니고 ‘가족’이어야 한다.
나를 사랑하자고 아우성치는 세상에서,
나는 언제, 나의 식구들과 저녁을 함께했는가?
나를 사랑하자고 아우성치는 세상에서,
나는 언제, 나의 식구들과 저녁을 함께했는가?
저녁상에 식구가 하나라도 빠져있으면 위치를 묻고 걱정해 주던 시대는 까마득하다. 지금 우리는 가족 해체를 경험하고 있다. 믿고 의지했던 가족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몸이 떨어져 있으니 밥은 제대로 먹는지,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다고 하는 건 아닌지 알 길이 없다. 위로받고 위로해 줄 가족이 곁에 없다. 그러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해소해 줄 뭔가를 찾아 나선다. 전형적인 동굴의 우상이다. 뭔가‘는 그림자일 뿐이다.
’금자‘라 불리는 56세의 한 여성은 세 아들을 둔 엄마로서 일밖에 모르는 남편을 둔 아내로서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글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예금자 씨의 글을 읽다 보면 답답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데, 자꾸 나의 슬픔이 올라온다. 왜 그럴까?
주인 없고 무게 없는 글자가 책이 되는 순간, 글자는 공적 영역이 된다. 일기장이 책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자신의 업적을 도배해 놓은 자서전 또한 서점 매대에 올려놓기 민망하다. 에세이도 조심스럽다. 예금자 씨의 대부분 에세이는 자신과 자신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글로 옮겼다. 그런데 담담하다. 남의 일처럼 읽힌다. 읽는 이가 먼저 가슴을 친다.
어느 날 검은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은 얼굴이 하얀 여자가 레이스가 잔뜩 달린 샛노란 원피스를 사서 엄마를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돌아갔다. 여자가 돌아가고 며칠 뒤, 많은 자식 배곯아 할까 늘 전전긍긍 일에 파묻혀 목욕 한번 시켜주지 않던 엄마가 웬일인지 목욕도 시켜주고 머리도 감겨 주었다.
다음날 그 노란 원피스는 내 차지가 되었고, 나는 그 원피스를 입고 하얀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우리 집에 왔던 그 여자의 양딸이 되고자 그 여자가 있는 서울의 원불교에 가게 된 것이다. 그때는 그곳이 원불교 법당인지 어딘지 알 수 없었지만 벽 한쪽에 커다란 둥근 원이 있었고, 그곳에서 어느 늙은 할머니가 노래를 시켰고, 난 최대한 예쁘게 보이기 위해 다소곳이 손을 배꼽 아래 모으고 머리를 까딱이며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큰 오빠의 반대로 며칠 있지 못하고 다시 코흘리개 산골 아이로 돌아오고 말았다.(94p)
’금자‘라 불리는 56세의 한 여성은 세 아들을 둔 엄마로서 일밖에 모르는 남편을 둔 아내로서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글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예금자 씨의 글을 읽다 보면 답답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데, 자꾸 나의 슬픔이 올라온다. 왜 그럴까?
주인 없고 무게 없는 글자가 책이 되는 순간, 글자는 공적 영역이 된다. 일기장이 책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자신의 업적을 도배해 놓은 자서전 또한 서점 매대에 올려놓기 민망하다. 에세이도 조심스럽다. 예금자 씨의 대부분 에세이는 자신과 자신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글로 옮겼다. 그런데 담담하다. 남의 일처럼 읽힌다. 읽는 이가 먼저 가슴을 친다.
어느 날 검은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은 얼굴이 하얀 여자가 레이스가 잔뜩 달린 샛노란 원피스를 사서 엄마를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돌아갔다. 여자가 돌아가고 며칠 뒤, 많은 자식 배곯아 할까 늘 전전긍긍 일에 파묻혀 목욕 한번 시켜주지 않던 엄마가 웬일인지 목욕도 시켜주고 머리도 감겨 주었다.
다음날 그 노란 원피스는 내 차지가 되었고, 나는 그 원피스를 입고 하얀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우리 집에 왔던 그 여자의 양딸이 되고자 그 여자가 있는 서울의 원불교에 가게 된 것이다. 그때는 그곳이 원불교 법당인지 어딘지 알 수 없었지만 벽 한쪽에 커다란 둥근 원이 있었고, 그곳에서 어느 늙은 할머니가 노래를 시켰고, 난 최대한 예쁘게 보이기 위해 다소곳이 손을 배꼽 아래 모으고 머리를 까딱이며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큰 오빠의 반대로 며칠 있지 못하고 다시 코흘리개 산골 아이로 돌아오고 말았다.(94p)

아홉 남매 중 일곱 번째, 금자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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