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가해방되는그날까지’
존브라운,그는극단주의자인가
아니면노에해방의상징인가
남북전쟁은노예해방전쟁으로요약되지만,미국의노예해방에는수많은이들의희생이있었다.그리고이전쟁으로이어지기까지흑인노예들의자유를위해동조한백인들도있었다.존브라운역시그들중한명이자남북전쟁전미국에서가장유명한노예해방론자였다.
당시노예제도를옹호하지만평화적인저항을고수한다른노예제폐지론자들과달리존브라운은평화적인저항은효과가없으며,억압적인노예제도를말살하는길은오로지폭력혁명밖에없다고판단했다.더구나누구보다종교적신념이강해,자신을노예를소유하는죄를범한자들에대한신의분노를대행하는도구라고믿었다.
1859년10월16일,그는노예해방운동을널리확산하기위해22명을이끌고버지니아주하퍼스페리의연방무기고를급습했다.이곳에서장창과소총무기를탈취해노예들을무장시켜노예제도를무너뜨리려했다.하지만하퍼스페리습격은36시간만에실패로돌아가며집단노예봉기를일으키지못했다.
“피를흘리지않고는죄를씻을수없다”
핍박받는이들이자유롭기를갈망한사람
그래서무기를들고저항한사람
과격한노예폐지론자존브라운이포로로잡혔다는소식은순식간에미국전역의이목을집중시켰다.신문들은이사건을‘봉기’나‘습격’이아니라‘반란’,‘반역’이라고표현했다.그는살인과반란공모,반역죄등으로사형을선고받아1859년12월2일에교수당했다.
존브라운에대한평가는당시는물론지금도첨예하다.‘노예해방의불씨’를지핀영웅이라는평가와에이브러햄링컨조차그를“미치광이”라고불렀을만큼극단주의자라는상반된평가가오갔다.노예해방이라는대의는더없이숭고한것이지만,행동은과격했다.
하지만존브라운은타락한세상에누구보다절망했고,누구보다핍박받는이들과함께아파하고그들이핍박으로부터자유롭기를갈망했다.그꿈을자신이직접나서서실현하고자했다.노예제철폐를위한‘극단적인모험’은미국남부와북부사이의뿌리깊은골을수면위로드러냈으며,미국은물론전세계에노예해방의불씨를지폈고,그의꿈은1년여뒤벌어진남북전쟁을거치며실현되었다.
부정의에대한저항과불복종을외친소로우
그가뜨겁게되살려낸존브라운
《존브라운을위한청원》
빅토르위고는‘그의처형은조지워싱턴이스파르타쿠스를죽이는것과같다’라고빗대며혁명으로선나라인미국이또하나의혁명가를죽여서는안된다고강조했고,당시그를지지했던헨리데이비드소로우는그를‘옳지못한세상의법에항거해야하는명령’을따른살아있는양심으로지칭했다.
소로우는외진호숫가에서오두막집을직접짓고홀로산경험을엮은《월든》으로유명하다.하지만자급자족과안빈낙도의삶을실천하면서도불의앞에서주저하지않은사회운동가로,이런면모와문제의식은노예해방과부당한정부에대한합법적인개인의저항을주장한《존브라운을위한청원》에서읽을수있다.
소로우는존브라운의대의명분을옹호했고,여러차례그의구명운동을펼치기도했다.존브라운을위해의회에탄원서를제출하는등노예제폐지운동에헌신하며정의를위한실천을촉구했다.정의를실천하는것은세상을변화시키는힘이다.잘못된것을잘못되었다고말하는것,그것을다른누군가가바로잡아주리라기대해미루지않고스스로나서는것.그것이소로우가말한‘한사람으로서의다수’이며,존브라운을적극옹호하고그를위해《존브라운을위한청원》을쓴의미일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