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1924년 6월 16일은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州) 창저우도(長州島)에 소재했던 황푸군관학교 백주년 기념일이다. 황푸군관학교 구지 기념관은 광저우 교민의 애국기지이다. 군관학교가 설립되고 폐교한 1927년까지 펌프같은 역할을 하는 한국독립운동의 주요 기지였기 때문이다.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고 군대가 해산된 대한제국의 애국 청년들이 입교했다. 나라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는 생각지도 못하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스스로 짊어진 이들이다.
황푸군관학교에 한인이 가장 많았던 시기에는 200여 명이 넘었지만『황푸군관학교동학록』에는 45명이 남아 있다. 입교 시 중국 국적으로 입학을 하거나 본명 외 가명을 많이 사용해서 확인되지 않기도 하지만 학적을 찾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1927년 4월과 7월, 두 차례 발생한 정변으로 인해 우한으로 집단 전학한 한인 학생의 학적 자료를 분실했기 때문이다.
황푸군관학교는 러시아 혁명 후 수립된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국공합작으로 설립했다. 한인 입교생들은 국공합작이라는 학교정책에 따라 공산당 계열이나 국민당 계열에 소속되어 중국혁명에 성실하게 참여했다.
적지 않은 한인들이 황푸군관학교에서 공산주의 영향을 받았지만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혁명방식은 달랐지만, 중국혁명을 완성하고 항전하여 조국의 독립과 해방 실현이라는 목표는 같았다.
아직 황푸군관학교는 일반인에게 생소하다. 이제 살 만해진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그들이 몰아쉰 거친 숨소리를 찾아 기념한다. 나는 교민들과 황푸군관학교 등 광저우 독립운동유적지 탐방을 주도했다. 이 책은 교민들에게 소개한 내용을 정리해서 황푸군관학교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다.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고 군대가 해산된 대한제국의 애국 청년들이 입교했다. 나라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는 생각지도 못하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스스로 짊어진 이들이다.
황푸군관학교에 한인이 가장 많았던 시기에는 200여 명이 넘었지만『황푸군관학교동학록』에는 45명이 남아 있다. 입교 시 중국 국적으로 입학을 하거나 본명 외 가명을 많이 사용해서 확인되지 않기도 하지만 학적을 찾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1927년 4월과 7월, 두 차례 발생한 정변으로 인해 우한으로 집단 전학한 한인 학생의 학적 자료를 분실했기 때문이다.
황푸군관학교는 러시아 혁명 후 수립된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국공합작으로 설립했다. 한인 입교생들은 국공합작이라는 학교정책에 따라 공산당 계열이나 국민당 계열에 소속되어 중국혁명에 성실하게 참여했다.
적지 않은 한인들이 황푸군관학교에서 공산주의 영향을 받았지만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혁명방식은 달랐지만, 중국혁명을 완성하고 항전하여 조국의 독립과 해방 실현이라는 목표는 같았다.
아직 황푸군관학교는 일반인에게 생소하다. 이제 살 만해진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그들이 몰아쉰 거친 숨소리를 찾아 기념한다. 나는 교민들과 황푸군관학교 등 광저우 독립운동유적지 탐방을 주도했다. 이 책은 교민들에게 소개한 내용을 정리해서 황푸군관학교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다.

황푸군관학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기지)
$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