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설은프랑스어전문번역가로활동해온,길혜연작가의첫번째장편소설이다.그는대학에서프랑스문학을전공했고,프랑스에서두차례에걸쳐총13년간체류한경험이있다.이체험은소설의구상에중요한밑거름이된다.구상은1998년에시작되었는데,탈고하기까지무려23년이걸렸다.두어가지다른직업에종사하면서,집중해서작업할수있는환경을갖지못했기때문이었다.(중략)
이작품을한마디로요약하자면,1895년생주인공정해용의남다른삶의궤적을,또다른주인공인1960년생김현우가되짚어따라가보는이야기다.김현우는처음엔,자신이왜타인의삶에그토록끌리는지잘알지못한다.하지만그것을따라가는과정에서,자신의삶을이해하고싶어서였다는것을알게된다.그는불현듯자신의삶에,우리각자의삶에숨어있는모종의힌트,즉사람들은모두,눈에보이지않지만,분명하고섬세한망으로연결되어있을지도모른다는,양자역학적힌트를얻게된것인지도모른다.이두사람에게는각자의가족이있으니,백여년에걸친그들의가족사가마치DNA의나선구조처럼펼쳐진다.대한제국과대한민국을아우르는한국의근현대사가파란만장했던만큼그들도평탄한삶을살지못했다.김현우가글을쓰는행위도,이섬세한망을짚어내는행위일것이다.김현우는일제치하에서살지도,세계대전이나한국전쟁을겪지도않았지만,그의부모,부모의부모가겪은재앙의그림자에서벗어나지못했다.아마도그것은집단적외상후스트레스장애의그림자라고할수도있다.그가정해용의삶에집착한또다른이유는,그그림자때문에이유없이힘겨운,자신의삶의뿌리,땅속에묻혀가려진채이리저리얽힌고통의‘리좀’을캐내고야말겠다는집념의결과일수도있다.
정해용의삶을관통하는근원적인불안은,어린시절에부모,특히어머니의부재,자신의아이를임신한채이별할수밖에없었던연인전단옥의기구한삶과,생사를알수없는자식의존재와더불어,자신의의지와상관없이휩쓸리게된정치적인사건에서비롯된것으로보인다.자식의생사를알지못하는인물은반복적으로나온다.전단옥이그랬고,김현우의아버지김사덕이그랬다.그들은대낮에눈을뜬채악몽을‘살아야’했다.흥미로운점은,〈덕이이야기〉의말미에서,김현우가힘겨운글쓰기작업을하면서,그것을중도에포기한다면자신의아이를가진연인을버리는것과도같은심정이될거라며,글쓰기의완성을통해무의식적으로정해용의불안을세습하지않으려저항하고있는듯보이는것이다.정치적사건으로말하자면,정해용이1919년에상하이에서유럽으로가는대형여객선에오르기직전,낯선남자로부터가방하나를전달받은것으로써,대한제국황제가일본의눈을피하려고,프랑스공사를통해유럽으로피신시킨비자금사건에휘말리게된것이다.
1980년파리.30대중반의프랑스여성마리즈는남동생앙투안에게서아버지정해용의부음을전해듣는다.그들은영국계프랑스인어머니와한국인아버지사이에서1940년대에태어났다.두사람은장례식을마치고아버지의집을정리하면서어린시절을회상하고,인상적인몇가지유품만을챙겨간직한다.
1998년,서울소재프랑스공관에서근무하는김현우는파리출장길에센강변의고서적상에서우연히책한권을발견한다.1930년대에파리에서거주하던한국인이프랑스어로쓴한국의민담모음집이었다.그는일제의식민통치시대에유럽에그런한국인이있었다는사실에강한호기심을느껴책을구매한다.서울에돌아온후,신문기사를통해1919년에프랑스로건너간정해용의존재를알게된김현우는,수소문끝에정해용의유가족인마리즈,앙투안과연락이닿아만난다.김현우는그들로부터정해용에관한이야기를전해듣고,그의육성이녹음된카세트테이프를건네받는다.녹음내용에는놀랍게도,정해용의개인사뿐아니라,한번도공개된적없는,패망한대한제국황실의비밀정보가담겨있었다.
정해용은,본인의의지와는무관하게도그정치적인사건에연루되어수십년동안그그림자에서벗어나지못한채생을마치게된사실이밝혀진다.그사건에는조선의초대프랑스공사앙리랑베르,유럽에서명성을얻은일본화가야마모토류이치가깊숙이관련되어있었다.이사실을알게된김현우는,충격과감동에휩싸여소설을쓰기시작한다.김현우의글쓰기에는,지리적인경계선을넘기위해몇번이고자기내면의경계도넘어야했던,혹은역으로,내면의경계를넘으려고지리적인경계선을넘었던정해용의삶에대한매혹이깔려있다.독자들은김현우소설의첫구절이이소설의첫구절과같을수도있겠다고상상한다.이것은김현우가쓰는소설일수도있다.
한편,다큐멘터리영화감독인마리즈는,아버지정해용이살아있을때는전혀알지못했던한국을발견해가는과정에서세상의모든실향민에대한영화를제작하기로하는데,김현우의아버지김사덕도한국전쟁실향민이라는사실을알고인터뷰를시도한다.마리즈는,김사덕이소중하게간직해온어린시절의가족사진을보다가,정해용의유품에서나온젊은여성의사진한장을꺼내보이는데,그안에서전단옥이라는여성에대한새로운사실을발견하게되지만,독자들은알게되는진실이,등장인물들에게는여전히베일에가려져있다.
1908년파리,1919년상하이,무르만스크,에딘버러,1920년프랑스동부쉬이프,1920년대의파리,1923년리용,1935년의경성,1960년파리,제네바,동베를린,1990년대후반서울등,직접적이거나간접적으로등장하는시간적,공간적배경을설정하면서,그에따른자료조사에도작가는많은시간과공을들였다.특히1919년무르만스크에서영국인함대를따라탈출한한국인노동자에대한자료는,영국과프랑스현지의기록보관소까지조사했다.그렇다고해도이것이역사소설은아니다.작가는,이소설이역사소설이아니게하려고,오랫동안사료를조사하고역사관련서적을탐독했다.
제국주의,국가주의,민족주의,오리엔탈리즘,공산주의,민주주의등,서로다른이념들의대립을가장먼원경에배치한채,역사적사실과실존인물에서영감을받았으나,완전히가공(加工)된인물들을통해,고통으로점철되어분열되고해체된것으로보이는,어떤개인들의삶은결코,망가진채고립된삶이아니며,다만거미줄위에서로연결되어이슬처럼맺혀있는조각그림과도같음을이소설은보여준다.해가나면이슬은사라지고거미줄또한영원할수는없다.결국,그들은모두몰락하는존재라는공통분모를지니고있다.하지만드넓은마른평야에서‘하얀십자가의숲’을이루며잠들어있는1차대전참전전사자들처럼그들은고통과희생의피를땅에뿌리며생명을준다.그땅은때로복구할수없을정도로파괴되기도하지만,살아있는것을지키는그들의방식은,스스로는몰락하면서다음생명을,생명의이야기들을이어간다.이소설은또한,우리는역사나개인사의이야기들을파헤치지만,완벽하게밝혀진이야기는없다는암시를준다.등장인물들은저마다자신의이야기를찾아가다가다른사람들의이야기와만난다.그리고그이야기들에는언제나,영원히감추어진부분이있다.
작가는역사의격랑을헤치며살아간다기보다는더빈번히그에떠밀려살아가는개인의삶에집중한다.무거운주제를지나치게비장하거나장중한문체로쓰지는않으려한점과다채로운배경에비해그묘사는가능한한간결하게처리한것이눈에띈다.대한제국황실비자금스캔들의진상을파헤치거나,정해용과김현우의접점을찾는소소한재미가있고,마약과섹스와폭력은빠진,-일제의국권침탈이가장수위높은폭력이긴하다.-21세기에보기드문소설이다.
현우는이제,사전에나와있는것처럼우연과필연이서로반대되는의미라는것에동의할수없었다.우연은필연의시작이고,몰랐던필연을우연이라이름붙인거라는생각이었다.
-8장「박스기사와녹음테이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