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준 평전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 삶을 살았던 독립운동가)

이규준 평전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 삶을 살았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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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신흥무관학교의 아버지이자 독립운동가 이석영과
비밀결사 다물단을 이끈 독립운동가 이규준!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슬픈 가족사
이규준은 조선 최고의 명문가이자 당대 최고의 부잣집에서 나고 자랐으나 귀공자의 삶 대신 험난한 항일투쟁가의 길을 걸었다. 1910년, 15세에 아버지 이석영과 함께 구국의 큰 꿈을 품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1911년 ‘독립군의 요람’인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고, 1913년 독립운동단체 ‘신흥교우단’을 결성했으며, 1915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국내외 독립투사와 연대해 군자금 모집 활동 등 항일투쟁을 했다. 1918년 일제의 불령선인 명단에 올라 감시의 대상이 된다. 1921년 상해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 모집 사건으로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본격적으로 의열 투쟁에 뛰어들었다. 1923년 비밀결사 ‘다물단’을 결성해 친일파와 일제의 밀정에 대한 응징에 나섰다.
1924년 당대의 거부였던 민정식이 상해로 망명했을 때 백범 김구, 나석주와 함께 일제의 체포 작전에 맞섰다. 1925년 기미독립선언 6주년을 기념해 중국 천진 시내에서 ‘태극기 자동차 애국 행진’ 시위를 주도했다. 1925년 중국 북경에서 거물 밀정 김달하를 처단해 일제 검경의 집요한 추적을 받게 된다. 1927년 독립운동 잡지 『적권』을 발행해 ‘펜을 든 투사’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1928년 일제가 한중의 항일 연대를 갈라놓기 위해 이간책을 펼치던 때 하북성 석가장으로 급히 떠난 뒤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2024년 6월 국립서울현충원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수년 전 이규준의 아버지인 이석영의 삶이 재조명되면서 잘못된 이야기가 기정사실처럼 세상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석영·이규준 부자의 후손이 절손(絕孫) 혹은 멸절(滅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절손’이라는 단어는 살아 있는 후손들의 가슴에 날카로운 못이 되었다. 이규준의 세 딸과 그 후손들의 존재는 이석영·이규준 부자가 험난한 시대를 살아낸 흔적이자 증거였다. 왜곡과 오류를 바로잡아야 했다. 이석영·이규준 부자의 후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국가에 독립유공자 유족으로 등록해 달라고 신청했다. 마침내 2022년 2월 국가보훈부는 “독립유공자 이석영 선생, 사후 88년 만에 직계 후손 확인” 사실을 발표했다.
김창희의 『이규준 평전』은 일제의 탐욕이 빚어낸 야만과 혼란의 시대에 불꽃처럼 살다 간 독립운동가 이규준과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독립운동가 이석영의 장남인 이규준은 비밀결사 다물단을 이끌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에게는 조국이 운명이었고, 겨레가 가족이었다. 그렇게 독립투쟁의 길을 가다 자신의 목숨마저 독립의 제단에 바쳤다. 그러나 이규준이 세상에 남긴 자취는 그다지 많지 않다. 33세라는 너무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데다 어떤 죽음을 맞았는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 책이 일제강점기에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가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저자

김창희

김창희는 독립운동가 이규준의 둘째 딸 이숙온의 손자이자 독립운동가 이석영의 고손자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세계은행(WB) 산하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서 국내 기업의 구조조정, 예산심의, 재정을 담당했으며 이후 국내외 금융 및 대체투자 분야에서 30년 이상 활동해온 대체투자 및 금융경제 전문가다.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주립대학에서 경영학(학사)을 전공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영대학원(석사)에서 공부했다. 세계은행 재정 예산 심의관, 싱가포르투자청 한국 대표, 현대자산운용 대표, WWG 자산운용 대표, 국토해양부(현재 국토교통부) 자문위원, 주한유럽상공회의소 위원, 경기도 혁신위원회 위원, 한국 유네스코회관 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머큐리 PE 대표이사다.

목차

머리말 ㆍ 5

제1장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마지막 ㆍ 15
제2장 아버지 이석영 ㆍ 21
제3장 반생의 반려를 만나다 ㆍ 55
제4장 원대한 꿈을 향해 ㆍ 69
제5장 또 다른 천명 ㆍ 83
제6장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다 ㆍ 99
제7장 신흥교우단, 그 초석을 놓다 ㆍ 127
제8장 신흥무관학교 생도에서 독립투사로 ㆍ 147
제9장 2대가 불령선인 명단에 오르다 ㆍ 159
제10장 상해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 모집 사건 ㆍ 171
제11장 은밀하게 위대하게 ㆍ 187
제12장 일파만파 ‘민정식 망명 사건’ ㆍ 195
제13장 다물단, 일어서다 ㆍ 207
제14장 거물 밀정 김달하 ㆍ 215
제15장 그 불꽃, 재가 되도록 ㆍ 229
제16장 만점 운동가, 영점 아버지 ㆍ 247
제17장 남겨진 이들의 삶 ㆍ 263
제18장 역사의 뒤안길 ㆍ 295
제19장 절손에서 직계 후손으로 ㆍ 321

주 ㆍ 336

출판사 서평

★ 조선 최고의 귀공자에서 일제가 두려워한 항일투쟁가로!
★ 이종각, 이단해 등 이명으로 살았던 숙명 같은 독립운동가의 삶!
★ 중국 천진 시내를 뒤흔든 ‘태극기 자동차 애국 행진’을 주도하다
★ 다물단의 이름으로 거물 밀정 김달하를 처단하다
★ 1928년 이규준의 마지막 행선지 석가장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파헤치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선각자, 이석영

이석영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자 형제들과 함께 만주로 집단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주인공이다. 당대 최고의 부자였던 양부 이유원에게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그는 이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의 종잣돈으로 활용했다. 많은 애국지사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했고,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온 수많은 젊은이를 먹이고 입히며 독립운동의 동량으로 키워냈다. 그의 재정적 뒷받침이 없었다면, 한국의 독립운동사는 지금과 결이 다른 단어들로 채워졌을 것이다.
이석영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두 동생 이회영과 이시영의 이름 뒤에 평생 머물렀지만, ‘저동 육형제’의 실질적인 리더이자 선각자였다. 특히 ‘교육 구국’, 즉 교육으로 구국의 꿈을 이루는 것은 이석영의 소신이자 신념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6월에 개교해 1920년 7월에 폐교될 때까지 약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독립군의 요람 역할을 해냈다.
이석영이 꿈꾸는 세상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공화국이었고, 적서와 남녀의 차별이 없는 평등한 세상이었다. 이석영의 삶은 칠흑 같은 시대를 비추는 은은한 달빛과 같았다.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헌신’이었다. 이석영은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내놓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공을 내세우거나 후회의 기색을 비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헌신’이었다. 이석영의 말년은 비참했다. 중국 상해 뒷골목에서 굶어죽다시피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신흥무관학교의 아버지’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의 인생은 충분히 빛나는 것이었다.

이규준, 신흥무관학교 생도에서 독립투사로!

이규준은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해 생도 시절부터 항일 투쟁에 나섰다. 1913년 교직원과 졸업생, 재학생이 함께 참여하는 독립운동단체 ‘신흥교우단’을 결성하고 국내외 독립투사들과 연대해 활동했다. 그는 신흥교우단의 ‘규칙기초위원’을 맡아 규범ㆍ강령ㆍ신조를 만들었는데, 그중 “나는 국토를 찾고자 이 몸을 바쳤노라”로 시작되는 ‘선열의 시범’은 훗날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즐겨 암송하는 맹세의 언약이 되었다.
신흥교우단이 독립 의지를 앙양시키고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발행한 선전지이자 계몽지인 『신흥교우보』(제2호)에는 이규준의 한시 「추야강무유감」이 실렸다. 당시 18세의 이규준이 이 한시에서 노래한 것은 일제에 대한 처절한 복수나 응징이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야만적인 폭력과 전쟁 그 너머의 새로운 세상, 진정한 평화를 향한 꿈이었다.
1915년 봄, 이규준은 신흥무관학교 4년 과정의 본과 졸업생이 되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다는 것은 이규준의 홀로서기가 시작되었다는 의미다. 아버지 이석영에게도 이규준은 품 안의 자식이 아니었다. 이석영이 심혈을 기울여 쌓은 독립운동의 초석 위에서 이규준이 펼쳐갈 ‘투사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2년간 의무적으로 독립군 또는 교사 등으로 현장에서 복무하는 게 불문율이었다. 이규준은 1917년을 전후해 특별한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국내로 파견되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두 숙부인 이회영과 이시영 사이에서 연락요원 역할을 하는 비밀 임무였다. 이때부터 이규준은 일제의 불령선인 명단에 올라 감시의 대상이 된다.

상해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 모집 사건

이규준의 항일 애국 활동은 1919년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지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임시정부과 연계해 독립투쟁을 펼치게 된 것이다. 1920년 가을, 이규준은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 당시 임시정부 재무총장을 맡고 있던 이시영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경성과 충청권을 오가며 여러 명의 동지를 규합해 활동한다. 이 무렵 임시정부는 비밀 연락원인 ‘특파원’ 제도를 운용하고 있었다. 젊은 인재들을 특파원으로 각지에 파견해 현지 비밀결사와 연계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선전 활동을 폈던 것이다.
신출귀몰하며 일제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던 이규준은 이듬해인 1921년 결국 체포되어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제령 제7호는 기미독립운동으로 지대한 타격을 받은 일제가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19년 4월 제정ㆍ공포하고 시행한 법령이었다. 이규준은 이 사건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자신을 온전히 내던져야 하는 의열 투쟁의 길로 접어든다.

김구, 나석주와 함께 펼친 ‘망명객 민정식 보호 작전’

이규준의 행적은 1924년 봄 ‘혁명의 도시’ 상해를 떠들썩하게 했던 ‘민정식 망명 사건’에서도 확인된다. 민정식은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인 민영익의 유일한 아들로 400만 평이 넘는 토지와 저택 등 거대한 부를 물려받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경성에서 자취를 감춘 지 한 달여 만에 가족들과 망명하기 위해 상해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것은 홍콩, 상해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했던 민영익이 상해에서 타계하기 전, 외국계 은행에 수십만 달러를 예치하고 아들 민정식만 찾을 수 있도록 조치해놓았다는 것이었다. 지금 화폐 가치로 수백억 원에 이르는 거액이었다.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던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민정식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자금을 기부받게 된다면 정체 중이던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로를 틔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한 일제는 상해 총영사관, 본토 내각, 조선총독부 등이 긴밀히 연계해 극력 저지에 나선다. 막대한 자금이 임시정부에 유입되면 항일독립투쟁의 불길이 더욱 거세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민정식의 기부를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임시정부도 이에 맞서 민정식을 지키려 했다. 이규준은 임시정부 내무총장 김구, 경무국 경호원 나석주 등과 연대해 ‘민정식 보호 임무’를 수행했다. 일제의 문건을 통해서도 이규준이 민정식 망명 사건에 관여한 정황이 확인된다. 이때의 인연으로 그 이듬해에 나석주는 이규준이 이끄는 다물단과 함께 독자적으로 국내 의열 투쟁을 추진하기도 했다.

중국 천진 시내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다

1925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 6주년을 기념해 중국 천진 시내에서 한 무리의 애국 청년들이 태극기를 단 자동차에 올라 시위를 했다. 프랑스 조계를 시작으로 영국과 이탈리아 조계, 옛 독일·러시아 조계, 일부 중국인 거리까지 가로지르면서 독립선언기념문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이 ‘태극기 자동차 애국 행진’은 각국 외국인들의 눈길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특히 망국의 한을 품고 살아가던 한인들에게 태극기 자동차 시위는 속을 뻥 뚫리게 하는 ‘사이다 질주’와 같았다. 이 애국 청년들의 중심에는 이규준이 있었다. 일제 천진 총영사가 내각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문서에는 이규준이 이명인 ‘이단해’로 거명되었다.
‘태극기 자동차 애국 행진’은 ‘한국이 독립정부를 세웠으며, 한국민이 간절히 광복을 염원한다’는 사실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알리고 여론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동안 천진 한인 사회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워온 일제도 의표를 찔리고 말았다. 일제가 경계했던 것은 이 태극기 자동차 시위를 계기로 옥외 가두시위로 점화되는 사태였다. 이규준은 남다른 실행력이 있어 ‘행동가’로 알려졌다. 일단 마음의 결정을 내리면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이규준이 넘치는 기백과 함께 전략적 판단력도 겸비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게 이규준은 더 담대하고 더 냉철한 독립투사로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거물 밀정’ 김달하를 처단하다

1923년 이규준이 중국 북경에서 조직한 ‘다물단’은 직접 행동으로 의열 투쟁을 하기 위한 비밀결사였다. 초기에는 서로 뜻이 통하고 신뢰가 쌓여 있는 신흥학우단 출신들로 단원을 구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물단이라는 이름은 “옛 강토를 회복하고 민족의 기상을 드높인다”는 신흥무관학교의 ‘다물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다물단은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선전 활동을 벌이다가 일제의 밀정이나 변절자가 포착되면 이를 응징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물단의 설립 취지 등 사상적 기틀을 다진 이는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였다. ‘단재 연보’에는 “이규준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다물단의 선언문을 기초해주었으며, 이 조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물단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거물 밀정’ 김달하 처단 사건이었다. 김달하는 북경 한인 사회의 유력 인사이자 박학다식한 한학자였지만, 조선총독부에 은밀히 줄을 대고 고급 밀정 노릇을 했다. 이규준은 사촌 여동생 이규숙(이회영의 딸)이 알려준 김달하 집의 내부 정황 등을 토대로 거사 계획을 세워 실행했다. 1925년 3월 다물단원 이종희와 이기환이 김달하의 집으로 찾아갔고, 이 두 사람이 사라진 뒤 김달하는 교살당한 사체로 발견되었다. 김창숙은 “다물단원들이 그(김달하)를 처단했다”고 했고, 김달하 사건이 일어난 지 2년 후 일제 경찰은 한 문건에서 “다물단원이 1925년 북경에서 ‘조선총독부 촉탁’ 조선인 김달하를 살해했다”고 서술해 그가 밀정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1928년 이규준은 왜 석가장으로 갔을까?

이규준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는 문서는 독립운동가 이우민의 경찰 신문조서다. 이우민은 치안 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1930년 서대문경찰서에서 여러 차례 신문을 받았는데, 이규준의 행방에 대해 “이규준이 1928년 여름 석가장에서 병사했다”고 진술했다. 저동 육형제 집안의 일각에서는 ‘이규준이 석가장으로 간다며 상해를 떠난 뒤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