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장미

빵과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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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우리에게 빵을 달라, 장미를 달라”
왜곡과 망각을 넘어 ‘빵과 장미’를 찾아가는 여정
노동자의 생존권과 인간다운 삶을 의미하는 ‘빵과 장미’는 일하는 사람 모두의 염원이 함축된 말이다. 이 책은 이 ‘빵과 장미’를 얻기 위해 함께 싸우고 돌보며 경이로운 역사를 써내려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12년 1월 미국 로렌스 파업은 여기에 가담한 여성 노동자가 ‘우리에게 빵을 달라, 장미를 달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었다 하여 ‘빵과 장미 파업’이라고도 불린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에 한 획을 그었을 뿐만 아니라 100년이 지난 지금도 풍부한 영감을 주고 있지만 이 사건은 미국의 맹목적인 애국주의와 ‘빨갱이 사냥’의 여파로 왜곡되었고 아예 잊혀져버렸다. 브루스 왓슨은 약 100년 전 51개국에서 ‘약속의 땅’을 찾아가 일하고 투쟁했던 남성과 여성들의 민중 서사시를 복원해 21세기를 사는 우리를 치열한 삶의 현장, 투쟁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저자

브루스 왓슨

1953년 미국 일리노이에서 태어났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고 매사추세츠 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했다. 미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글을 쓰는 작가이며 임시직 타이피스트, 공장 노동자, 평화봉사단원으로 일했다. 특히 ‘빵과 장미’ 파업의 주무대인 로렌스시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근무한 바 있다. 《스미소니언 매거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보스턴 글로브》 등에 기고하며 『사코와 반제티』, 『자유의 여름』, 『아이들과 장난감을 바꾸어낸 남자』 등을 지었으며 이 책들은 뉴욕 공립 도서관이 꼽은 25권의 책, 워싱턴 포스트 올해의 책,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다. 2017년 이 역사적인 로렌스 파업의 역사, 현재, 미래를 위한 유산에 공헌한 개인과 기관을 기리는 ‘빵과 장미 명예의 전당 상’을 받았다.

목차

추천사: 왜곡과 망각을 넘어 ‘빵과 장미’를 찾아서
머리말: 영웅적인 투쟁, 새로운 공동체

1부 아메리칸드림, 희망과 악몽
1장 빵 네 덩이 파업
2장 이민자들의 도시
3장 메리맥강 전투
4장 성조기와 총검
5장 다이너마이트 음모
6장 통제 불능에 빠지다

2부 역사의 법정에서
7장 두 쪽이 난 나라, 미국
8장 아이들의 탈출
9장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
10장 1912년, 의회 청문회
11장 미국식 양탄자
12장 “자유의 깃발이 여기에 있다”

맺음말: 헌신자와 순교자
옮긴이 해제: 영원한 현재의 이야기

주│참고문헌│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왜곡과 망각을 넘어 ‘빵과 장미를 찾아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의미하는 빵과 풍요로운 문화를 즐기는 삶을 의미하는 장미. 노동자의 생존권과 인간다운 삶의 염원을 이보다 더 강렬하게 압축하여 호소력 있게 빚어낸 말이 또 있을까? 사실 ‘빵과 장미’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다. 1911년 시인 제임스 오펜하임은 〈빵과 장미〉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우리는 행진하고 행진한다 / 숨져간 무수한 여성들이 울부짖으며 함께 간다 / 우리는 아득한 옛날부터 그녀들이 부르던 빵의 노래를 부른다 / 허드렛일에 지친 그녀들의 정신은 예술도 사랑도 아름다움도 거의 알지 못했다 / 맞다, 우리는 빵을 얻기 위해 싸운다, 하지만 우리는 장미도 얻기 위해 싸운다

이 오펜하임의 시와 여기에 곡을 붙인 주디 콜린스의 노래, 그리고 지치지 않고 노동계급의 삶과 투쟁을 이야기하는 켄 로치의 영화에서 우리는 ‘빵과 장미’를 만난다. 또한 미국과 유럽에는 빵과 장미라는 이름의 사회 프로그램이 수백 개나 되고 이 사건의 본고장인 로렌스에서는 배고픈 사람에게 따뜻한 밥을 주는 음식 창고 ‘빵과 장미’가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로렌스 파업’ 혹은 이 파업에서 여성 노동자가 “우리에게 빵을 달라, 장미를 달라”라고 쓰인 피켓을 들었다 하여 ‘빵과 장미 파업’이라고 불리는 이 투쟁이 어떻게 일어났고 노동운동, 사회운동의 역사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할 뿐 아니라 풍부한 영감을 주는 투쟁임에도 이 빵과 장미의 실체는 철저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공식 역사’는 전설적인 노동운동의 지도자와 굶주린 노동자들이 기적 같은 승리를 일구어낸 이 사건을 철저히 묻어버렸다. 미국의 주요 역사 교과서 열두 권 중에 무려 열 권이 이 사건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두 세대가 흐르는 동안 파업 진압에 나섰던 로렌스 시 정부, 보수적인 교회, 공장주들, 권력 기관은 이 파업이 세계산업노동자연합(IWW)이라는 외부 선동 세력이 일으킨 난장판이라고 선전했으며 이를 공식 역사로 만들어버렸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세계대전 전야의 ‘빨갱이 사냥’과 호전적인 분위기에서 당시 파업에 가담했던 노동자들은 짓눌려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 세월이 흘러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하나 세상을 떠났고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다시 기록할 책임은 후손들과 역사가들에게 남겨졌다.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멋진 티셔츠처럼, 유행으로 소비되며 이미지와 실체가 유리된 빵과 장미라는 기호 뒤에 숨겨진 투쟁의 전체상을 복원하기 위해 왓슨은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꼼꼼히 수집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두텁게 기술해 21세기를 사는 우리를 1912년의 로렌스로 인도한다. 학술서가 아닌데도 각주와 참고문헌이 2000여 개에 이른다.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파업 중 하나는 1912년 1월 12일 한겨울에 일어났다.

24센트, 빵 세 덩이 파업
1912년 매사추세츠 주 정부는 노동시간을 주 56시간에서 54시간으로 줄였다. 공장주들은 줄어든 노동시간을 벌충하기 위해 기계의 가동 속도를 높였고 임금까지 깎아버렸다. 깎인 임금은 24센트, 빵 세 덩이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공장 여기저기에서 “임금이 적다, 임금이 줄었다!”는 고함이 터져나왔다. 맨 먼저 폴란드 여성 노동자들이 작업을 거부하고, 모두 함께 “나가자!”고 외치기 시작했으며 이에 동조한 노동자들이 우르르 길거리로 쏟아져나갔다. 목격자의 회상에 따르면 이 파업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전기 불꽃”처럼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1만 명으로 불어난 파업 대오는 미국인이 아니었다. 다수가 영어를 모르는 전 세계 51개국에서 온 이민자들로 각자 모국어로 소리 높여 외쳤다. 이탈리아어로 시오페로, 프랑스어와 포르투갈어로 그레베, 폴란드어로 스트라이쿠야, 리투아니아어로 스트레이코킴, 이디시어로 슈트라이켄, 독일어로 스트라이크, 요컨대 “파업!”이었다.

유토피아를 꿈꾸며 건설된 도시 로렌스
애초에 로렌스는 영국 섬유 도시의 참상을 목도한 이들이 이와는 전혀 다른 유토피아를 꿈꾸며 건설한 도시였다. 도심 건물은 벽돌과 석재로 짓고 3층을 넘지 않아야 했으며 한 필지에 한 주택, 한 거주지에 한 가족만 살도록 했다. 하지만 이런 이상주의는 20세기 자본의 탐욕에 의해 한순간에 무너졌다. 메리맥강의 수력을 이용한, 세계에서 가장 큰 섬유 공장들이 잇달아 들어섰고 공장주들은 모직물을 제조하는 데 필요한 노동자를 전 세계에서 끌어들였다. 로렌스는 곧 거대한 빈민가로 변해버렸다. 도시 한가운데 빈민촌이 생겨났으며 쓰레기와 생활하수가 골목을 채우고 운하로 밀려들었다. 아이들은 빈민가의 미로 같은 골목에서 놀고 싸우고 각자의 언어로 욕설을 퍼부었다. 1912년의 로렌스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인구 8만 6000명이 18제곱킬로미터 면적에 쑤셔 넣어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였다. 불꽃 하나만 튀어도 활활 타오를 가연성 도시였다.

희망이 악몽으로
이 섬유 도시의 지배자는 아메리칸 모직의 소유주 윌리엄 우드였다. 포르투갈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우드는 도금鍍金 시대에 평범한 노동자로 첫발을 내디뎠으나 불과 몇 십 년 만에, 미국을 대표하던 자본가인 록펠러와 카네기보다 부유한 거물이 되었다. 그는 로렌스시에 주민들이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불렀던 대공장을 지었으며 여기에 1470대의 동력 배틀을 놓고 노동자들을 경주마처럼 몰아댔다. 결과는 자명했다. 기계에 몸이 부서진 사람, 베틀이나 물레 사고로 불구가 된 사람이 부지기수였고 습하고 탁한 공기 속을 떠도는 섬유질을 흡입해 10년 안에 3분의 1일 죽어나갔다. 퍼시픽 공장의 경우 사흘에 이틀 꼴로 사고가 났다. 용케 사고와 질병을 피할 수 있었다 해도 몸이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졌다.
로렌스시의 의사와 성직자의 평균수명은 예순다섯 살이었고 공장 보스들은 쉰여덟 살이었다. 하지만 노동자의 경우 고작 서른아홉 살이었다. 파업이 벌어지기 한 해 전 로렌스의 사망자 1500명 중 거의 절반이 여섯 살도 안 된 아동이었고 500명 이상은 첫돌도 맞지 못한 아기들이었다. 로렌스는 미국에서 영아사망률이 가장 높은 도시였다. 노동자들은 침실 두 개짜리 아파트에 보통 여섯 명이나 여덟 명이 살았고 침대 하나에 네 명이 자기도 했다. 이런 막장 같은 환경에서 불붙은 파업은 전쟁처럼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산업노동자연합(IWW)이 파업을 지도하다
당시 미국노동총연맹(AFL)은 조합원 200만 명을 자랑하는 거대 조직이었다. 이들은 백인 숙련 노동자들만을 회원으로 받아들였으며 여성과 아동, 이민 노동자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섬유 도시 로렌스는 절반이 넘는 노동자들이 여성과 아동이었으며 대다수가 기계 부품처럼 대체 가능한, ‘하잘것없는’ 존재들이었다.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던 이들은 창립된 지 얼마 되지 않던 IWW에 지원을 청했다. IWW는 인종, 성별, 국적, 기술을 가리지 않고 회원으로 받아들였으며 노동자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밑바닥 진창까지 내려갈 각오가 되어 있는 이들이었다.
IWW의 조직가 조지프 에터가 로렌스에 도착했다. 영어, 이탈리아어, 폴란드어 등 5개 국어에 능했고 미 전역을 돌아다니며 이민자, 부랑자 같은 가난한 무리들을 헌신적인 파업 노동자로 거듭나게 한 에터는 민족별, 직종별로 갈가리 찢겨져 대립하던 로렌스 노동자들을 하나로 단결시켰다. 무엇보다 폭력 사태를 경계했다. “파업 투쟁에서 흐르는 피는 항상 노동자들의 피”이며 총을 든 군인들에게 빌미를 주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에터는 자신의 연설을 이탈리아어로 되풀이했으며 다른 이들이 나와서 프랑스어, 폴란드어, 리투아니아어 등으로 통역을 해주었다. 에터는 열네 개 민족 단위에서 대표자를 뽑아 56인으로 구성된 파업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여기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군대와 경찰 그리고 노동자의 전투
파업 노동자는 최대 2만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장은 민병대를 소집했다. 미국에서 노사관계가 폭력으로 얼룩질 때마다 민병대는 여러 차례 파업과 폭동 진압에 투입되었고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로렌스에서도 수십 수백 명이 죽어나갈 터였다. 에터는 1주일 내내 도시를 뛰어다니며 노동자와 민병대의 충돌을 막았고 쉼 없이 연설하며 노동자들의 의식을 일깨웠다. “노동자들에게 소방 호스로 물을 뿌릴 수는 있겠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 프롤레타리아가 일으킨 반란의 불꽃은 세상의 어떤 소방 호스로도 끌 수가 없습니다.”
파업의 불길이 잦아들긴커녕 더욱 활활 타오르자 스캔런 시장은 민병대를 추가 동원하고 모종의 공작을 수행할 요원을 채용했다. 며칠 후 로렌스시 여기저기에서 다이너마이트가 발견되었다. 무려 스물여덟 개로 우드의 집과 공장, 병기창, 경찰서를 노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놀랍게도 경찰들은 다이너마이트가 숨겨진 장소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결국 찾아냈다. 다이너마이트는 에터가 매일 신문을 받아 가는 장소 바로 옆의 구두닦이 가게에서도 발견되었다. 분명 누군가 ‘심어놓은’ 것이었다. 노동자와 공장주, 시 정부의 적대감은 높아졌고 도시의 공기는 긴장으로 더욱더 팽팽해졌다.
파업이 길어지고 노동자와 아이들이 굶주리자 프랑스계 벨기에인 협동조합이 수프 주방을 열었다. 굶주린 사람들은 아침과 오후 하루 두 번 수프를 먹었고 서로 정보를 교환했다. 도시 밖에서는 파업 기금을 보내고 달걀과 가축 같은 현물을 들고 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기운을 차린 노동자들은 매일 모여 행진하고 토론하고 노래를 부르며 피켓라인을 지켰다. 여러 사안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특별한 회복력과 재생력이 생기면서 파업에 더욱더 힘이 실렸다.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으므로 노동자들은 자기 자리에서 더욱더 발판을 다졌고 파업 대오에는 정서적 감정적 열기가 더해졌다.

사망자가 발생하다
협상의 전망이 보이지 않자 도시는 더욱 혼란에 빠져들었다. 노동자들은 일거리도 먹을거리도 없이 3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