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가장고결한위조범”
여권과신분증,각종서류를위조해
1만명을살려낸전설의레지스탕스
염색공,위조범,사진가,그리고레지스탕스
2023년1월10일『르몽드』,『리베라시옹』,『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를비롯한유력신문들은아돌포카민스키가파리의자택에서97세를일기로영면했다고보도했다.카민스키는2차대전당시쥘리앵켈레르라는가명으로레지스탕스에가담해여권과신분증,문서를위조하여1만명이넘는사람들을살려냈다.이렇게살아난이들은대부분어린이였다.
카민스키가족은타의에의해여러차례삶의터전을옮겼다.러시아에서프랑스에서,프랑스에서아르헨티나로,아르헨티나에서다시프랑스로.한나아렌트에따르면,인간이‘권리들을가질권리’를가지기위해서는정치적공동체에속해야하며가장확실한증거는적절한서류를소지하는것이다.“하지만어떤정치적공동체에도속하지못하고적절한서류도갖추지못한이들은전쟁과혁명의소용돌이에휘말려고향을떠나자마자노숙자가되었고국가를떠나자마자무국적자가되었다.인권을박탈당하자마자무권리자가되었고지구의쓰레기가되었다.”
카민스키가족을비롯한동유럽유대인은누구보다아렌트의통찰을뼈저리게느꼈다.카민스키의아버지살로몽이러시아유대인사회주의조직인분트에서활동했기에1917년러시아혁명이일어나자프랑스정부는이가족을추방해버렸다.카민스키일가는아르헨티나로떠났다가나중에다시프랑스로돌아가려했지만기약없는난민신세가됐다.한달이나배를타고프랑스에도착했지만입국을거부당했고입국허가가떨어질때까지터키에서막막한세월을보내야했다.고작다섯살어린나이에카민스키는‘서류’라는단어의의미를확실히알았다.합법적으로한나라에서다른나라로이동하려면신원을입증하는자료가반드시필요하다.하지만카민스키가족처럼수십년동안이나라에서저나라로쫓겨다닌사람들은그런자료를손에넣기가너무도힘들었다.그랬으니제2차세계대전을비롯한전쟁과혁명의소용돌이에휩쓸려쫓기고내몰린수많은사람들은카민스키에게결코남일수가없었다.
“내가1시간잠들면아이들30명의목숨이사라진다”
카민스키의최종학력은초등학교졸업.가난한가족의생계를돕기위해열세살때부터공장에서일했다.하지만프랑스가나치에점령당한후유대인은공장에서도추방되었다.카민스키는염색업자의견습생이되어마술같은염색과탈색의세계에흠뻑빠졌고단순히기법을익히는것을넘어화학의근본원리를깊이탐구했다.전문서적을구해독학을했으며아무도보지않는밤에는홀로실습을하면서경험을쌓았다.이렇게먹고살기위해익힌기술로수많은사람의목숨을살리고자신의목숨또한살렸으니얼마나야릇한인생의아이러니일까.
1943년카민스키가족은파리외곽의드랑시수용소로끌려갔다.이드랑시에서수만명의유대인이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수용소로끌려가목숨을잃었다.이들가족이살아난것은순전한행운이었다.아돌포의형폴이필사적으로아르헨티나영사의청원에매달리지않았다면(가족의국적이아르헨티나였다)그들역시가스실에서죽었을것이다.카민스키는사랑하는친구들은모두죽은마당에왜자신은살아나왔단말인가,반문하며자책했다.차라리수용소에서죽고싶었다고술회한다.다시세상으로나오긴했지만가족의처지는여전히위태로웠다.신분증에커다랗게“유대인”이라고찍혀있었기때문이다.카민스키의아버지는살기위해서는위조신분증이필요하다고생각했고,조직에서같이활동했던친구를통해레지스탕스에접촉하기로했다.
카민스키는화학지식을쌓았고폭탄을만들줄도알았지만레지스탕스는그의염색기술에더관심을보였다.그들은국경을넘는사람,영국에서보낸비행기에서낙하산을타고내려오는조직원,추방위기에처한유대인을위해위조서류를만들어야했다.카민스키는놀라운수완과창의력을발휘해여권과신분증,결혼증명서,세례증명서,배급허가증등나치의추적을피하는데필요한모든서류를감쪽같이만들어낼수있었다.파리위조범의놀라운능력에대한소식이레지스탕스네트워크에퍼졌고카민스키의작업실은일주일에최대500건의주문을받았다.어느날,파리의유대인가족의체포가임박했으며사흘안에300명의유대인어린이의서류를만들어내야한다는지시가떨어졌다.300명이면각종서류가900개는필요할터였다.도저히해낼수없는불가능한임무였다.카민스키와동료들은한시간에서른개의위조문서를만들어야했고잠깐이라도눈을붙일새도없었다.한시간잠들면30명의생명이사라지는상황이었다.밤샘작업을마치고카민스키는정신을잃고기절해버렸다.
타인에대한책임감,살아남은자의죄책감
카민스키의위조작업은나치가패망하고제2차세계대전이끝난후에도계속이어졌다.죽음의수용소에서살아남았지만‘조국’을잃어버렸기에팔레스타인에새조국을건설하기를열망하던유대인,제국주의프랑스에맞서싸우던알제리인,베트남의전장에서탈영한미군병사,혁명의불길이타오르던남미여러나라의망명자,그리고독재에신음하던스페인과포르투갈,그리스의저항운동가들이카민스키가만든위조여권으로목숨을건졌다.이렇게30년세월동안쫓기는사람들,내몰리는사람들,목숨이경각에달린사람들을위해헌신했지만아무런대가도요구하지않았다.돈을받으면,돈때문에그런일을하면자신이생각하는정의와불의에대해올바른주장을할수없기때문이다.
사람들은카민스키가제2차세계대전이끝난후에도‘레지스탕스’를이어간이유를궁금해했다.이제자기목숨이위태로운처지도아닌데왜암살이나투옥의위험을무릅쓰면서,자기삶을희생해가면서먼땅에서일어나는오만가지투쟁을지원했을까.이유는,열일곱살어린나이에죽음의수용소에서알아버린타인에대한책임감,친구들은모두죽었는데자신은살아남은것에대한죄책감때문이었다.그는이감정을평생간직했기에쫓기는누군가도움을청하면거절할수가없었다.
사람들이어쩌다위조범이되었느냐고묻자카민스키는“그냥,어쩌다보니……”하고답했다고한다.엄혹한세월에사람을구한위조는단순한기술이아니라소명이자윤리였다.하지만카민스키는식민주의,제국주의세력에봉사하는것은단호히거부했다.또다시인도차이나를정복하려는프랑스군대의요청을거부했고,유대국가건설의꿈을품고팔레스타인으로건너간동지들이태도를바꾸어아랍인을적대하자그들과단호히결별했다.‘나라잃은’유대인이팔레스타인으로이주하는데도움을준일은후회하지않았지만이스라엘정부가훈장을주겠다는제안은거부했고결코이스라엘땅에발을디디지않았다.
카민스키는자신의삶에대해이렇게술회한다.“위조범으로서내삶은끝없는저항의연속이었다.나치즘이패퇴한후에도나는불평등,분리정책,인종차별,불의,파시즘,독재에저항해왔다.내가사용할수있는유일한무기,즉위조기술과지식,기발한사고,흔들림없는이상으로나나름의투쟁을30년가까이이어갔다.우리에게는상황을바꿀힘이있다는확신을품고그저손놓고있기에는도저히참을수없는현실,그저지켜볼수만은없는현실과맞서싸웠다.더나은세상은만들어가야하는것이라고믿었기에가능한한힘을보탰던것이다.그러한세상이오면더이상위조범은필요하지않을것이다.나는여전히그런세상을꿈꾼다.”
2023년1월아돌포카민스키는97세를일기로세상을떠났다.파리코뮌의전사들을비롯한수많은저항자들이묻힌페르라셰즈묘지에서열린‘반역자’의장례식(카민스키는알제리인들의대의에동의했고알제리독립투쟁에열렬히참여했다)에프랑스정부에서는아무도참석하지않았다.대신프랑스주재알제리대사가그의무덤에꽃한다발을바쳤다.
“아버지의삶을들려주세요”
테드(Ted)강연에서지은이사라카민스키는어떻게이책을쓰게되었는지를말한다.아돌포는사진가이자교사였고,자식들에게는항상법을잘지켜야한다고엄히가르친아버지였다.위조범이자레지스탕스로살아온지난세월에대해서는한마디도하지않았다.이책을쓴딸사라는알제리에서태어났다.주변사람들은존경을가득담아아버지를무자이드(전사)라고불렀고아버지가제2차세계대전과알제리전쟁에참여했다는이야기를했다.사라는또프랑스정부가보낸서류를보았다.아버지가비밀정보부에서복무하며전쟁승리에공헌한일에감사한다는내용이었다.사라는전쟁은군인들이하는일이라고생각했기에평화주의자이고비폭력을신봉하는아버지가철모를쓰고총을든모습은상상하기도어려웠다.궁금해서물어보았지만아버지는아무말도하지않았다.
사라는한아이의어머니가되었고,이제나이가한참든아버지에게진실을알아내야할때라고생각했다.아버지가이대로침묵하며비밀을간직한채로세상을떠날지도모른다고생각했기때문이다.불러내야할기억도,찾아야할사람도,방문해야할장소도많았다.책을쓰자는제안에아버지는바로동의했지만걱정이있었다.“사라,공소시효가있다는것은알고있니?”공소시효,아버지가무엇보다먼저알고싶어한것이었다.죽음에직면한사람들을도울때마다아버지는법을어겨야했고대의에헌신하느라감옥에갈위험,심지어사형을당할위험을감수해야했다.아버지가자신의비밀을털어놓는데그토록오랜세월이걸린이유였다.
아버지의옛동지들을찾기위해서는많은여행을해야했다.한명은포르투갈에,또한명은알제리에,다른한명은이스라엘에,나머지는스위스,이탈리아,미국,중남미에흩어져있었다.일부는이미소식을알수없는상태였다.증인이아직살아있을때가능한한많은증언을들어야했고아버지의기억을불러내야했다.이런과정을거쳐출간된이책은프랑스에서빠르게성공을거두었고이탈리아,독일,스페인,이스라엘,아랍,터키,미국에서출간되었다.2009년당시프랑스언론의관심도집중되어카민스키는텔레비전과라디오방송에출연했고오랜꿈이었던사진전을열었다.독자사인회를열었을때어떤사람들은집안에전해져내려오는위조신분증을가져와혹시아돌포씨가위조한것이아닌지물어보았다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