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상실과 죽음, 그리고 위로의 문명사에 대한 프랑스 석학 자크 아탈리의 통찰
프랑스의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의 저서 『위로의 역사』는 인류가 죽음과 고통, 상실이라는 근원적인 불안에 직면했을 때 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견뎌왔는지 그 변화 과정을 역사적 맥락에서 짚어낸다. 단순한 심리학적 위로가 아닌, 죽음이 불러온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인류가 발명한 문화적·사회적 장치들의 역사이다.
원시 사회부터 고대 제국, 그리스·로마, 그리고 주요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시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별로 문명이 죽음에 맞닥뜨린 인간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어떤 ‘위로의 기술’을 제공했는지 시대순으로 조망한다. 위로의 메커니즘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다양한 방식으로 바뀌어가며 죽음의 공포가 사회의 근간을 흔들지 않도록 해왔다.
당신이 슬픔의 격렬함에 휩싸여 있을 때는 정면으로 맞서면 안 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습니다. 나의 위로가 오히려 당신의 고통을 더 심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몸에 병이 났을 때 너무 이른 처방이 오히려 해롭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습니다. 당신의 슬픔이 저절로 누그러지기를, 그리고 시간이 당신의 마음을 다스려 마침내 위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가 오기를(세네카 p. 61).
고대와 중세는 종교의 시대였다. 이 시기 위로의 핵심은 부활의 희망과 낙원의 존재에 대한 종교적 믿음이었고, 그 과정은 공통체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내세의 구원과 신의 섭리를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상실의 고통을 위로받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낙원)을 비유로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 한줄기의 강이 이 기쁨의 장소에서 발원해 낙원을 적시고, 그 땅에 그늘을 드리우는 모든 아름다운 과실나무들을 적셔 줍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p.75).
종교의 절대적인 영향력이 약해지고 점차 개인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신앙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연옥’ 개념이 이 때 등장한다.
죽음을 좀더 견딜 만한 것으로 여겨지게 하기 위해, 천국과 지옥 사이에 ‘연옥’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만들어졌다. 연옥은 사죄 받지 못한 대죄(死罪)는 없으나 그렇다고 ‘의인’의 반열에도 들지 못한 영혼들, 예컨대 아이들의 영혼이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며 머무는 곳으로 상정되었다(p.92).
근대 계몽주의 시대가 되면 부활과 낙원에 대한 믿음이 의심을 받으며 종교를 중심으로 한 위로가 종말을 고하고, 이성과 과학, ‘인류의 진보’가 새로운 위로의 수단으로 떠올랐다.
인간의 불행, 특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은 우주라는 거대하고 역동적인 질서에 따른 것이며, 인류는 그 거대한 우주에서 극히 작은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 앞에서 얻을 수 있는 위로는 불행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빌헬름 라이프니츠 p.123).
현대 사회는 시장의 시대이다. 의학과 정신분석이 종교를 대신해 위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장례업과 보험, 오락 등 위로가 ‘상품화’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누구도 슬픔에 대해 의사에게 치료받아야 하는 병적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애도 중의 행동이 정상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 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극복되리라고 기대하며, 그 과정을 방해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심지어 해롭다고 여기기도 한다(지그문트 프로이트 p.150).
아탈리가 이 책에서 던지는 화두는 현대 사회가 죽음과 상실을 대하는 방식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죽음을 격리하고 은폐하기까지 하며, 효율적으로 처리해야 할 상품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안락사(혹은 존엄사) 역시 중요한 이슈로 등장한다.
모든 예술적 지평에는 비탄과 애도, 죽음의 편린이 깊숙이 뿌리내려 있으며, 대중은 공포 영화나 법의학자라는 가공의 인물에 열광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죽음은 대개 위로의 온기를 결여한 채, 산 자의 영혼에 닿지 못하는 허망한 ‘죽음의 유희’일 뿐이다(p.166).
상실과 소외가 심화할수록 위로의 필요성은 커지고 위로는 사회 유지의 중요한 축이 된다.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행위일 수 있다. 위로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내가 겪지 않은 불행에 안도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탈리는 이를 ‘이기적 이타주의’라고 부른다.
위로 역시 근본적으로는 이기적인 행위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이를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이미 위로를 주기도 한다. 이것을 ‘이기적 이타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다른 이를 도우면서, 내가 행할 수 있는 선과 다행히 내가 겪지 않아도 되는 불행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다(p.184).
아탈리는 궁극적으로 ‘위로가 필요없는 사회’라는 실천적 대안을 제시한다. 고통이 닥친 후에 달래는 소극적 위로를 넘어, 죽음으로 인한 고독과 상실에 무너지지 않도록 사회적·제도적 안전망을 구축하고 마음의 면역력을 키우는 ‘예방적인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할 수 있는 한 자주 사랑한다고 말하고, 슬픔이 덮쳐 오기 전에,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오기 전에, 아무런 대가 없이 미리 위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위로가 슬픔에 대한 최선의 답은 아니다. 위로는 단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함을 받아들여야 할 때 필요한, 불가피한 응답일 뿐이다(p.196).
『위로의 역사』는 당신은 지금 어떤 방식으로 위로받고 있으며, 누구를 위로하고 있는지 묻는다. 신과 거대 담론이 사라지고 위로가 상품화되는 시대에, 기술과 물질이 해결하지 못하는 인간 근원의 실존적 고뇌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원시 사회부터 고대 제국, 그리스·로마, 그리고 주요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시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별로 문명이 죽음에 맞닥뜨린 인간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어떤 ‘위로의 기술’을 제공했는지 시대순으로 조망한다. 위로의 메커니즘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다양한 방식으로 바뀌어가며 죽음의 공포가 사회의 근간을 흔들지 않도록 해왔다.
당신이 슬픔의 격렬함에 휩싸여 있을 때는 정면으로 맞서면 안 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습니다. 나의 위로가 오히려 당신의 고통을 더 심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몸에 병이 났을 때 너무 이른 처방이 오히려 해롭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습니다. 당신의 슬픔이 저절로 누그러지기를, 그리고 시간이 당신의 마음을 다스려 마침내 위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가 오기를(세네카 p. 61).
고대와 중세는 종교의 시대였다. 이 시기 위로의 핵심은 부활의 희망과 낙원의 존재에 대한 종교적 믿음이었고, 그 과정은 공통체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내세의 구원과 신의 섭리를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상실의 고통을 위로받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낙원)을 비유로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 한줄기의 강이 이 기쁨의 장소에서 발원해 낙원을 적시고, 그 땅에 그늘을 드리우는 모든 아름다운 과실나무들을 적셔 줍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p.75).
종교의 절대적인 영향력이 약해지고 점차 개인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신앙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연옥’ 개념이 이 때 등장한다.
죽음을 좀더 견딜 만한 것으로 여겨지게 하기 위해, 천국과 지옥 사이에 ‘연옥’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만들어졌다. 연옥은 사죄 받지 못한 대죄(死罪)는 없으나 그렇다고 ‘의인’의 반열에도 들지 못한 영혼들, 예컨대 아이들의 영혼이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며 머무는 곳으로 상정되었다(p.92).
근대 계몽주의 시대가 되면 부활과 낙원에 대한 믿음이 의심을 받으며 종교를 중심으로 한 위로가 종말을 고하고, 이성과 과학, ‘인류의 진보’가 새로운 위로의 수단으로 떠올랐다.
인간의 불행, 특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은 우주라는 거대하고 역동적인 질서에 따른 것이며, 인류는 그 거대한 우주에서 극히 작은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 앞에서 얻을 수 있는 위로는 불행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빌헬름 라이프니츠 p.123).
현대 사회는 시장의 시대이다. 의학과 정신분석이 종교를 대신해 위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장례업과 보험, 오락 등 위로가 ‘상품화’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누구도 슬픔에 대해 의사에게 치료받아야 하는 병적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애도 중의 행동이 정상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 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극복되리라고 기대하며, 그 과정을 방해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심지어 해롭다고 여기기도 한다(지그문트 프로이트 p.150).
아탈리가 이 책에서 던지는 화두는 현대 사회가 죽음과 상실을 대하는 방식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죽음을 격리하고 은폐하기까지 하며, 효율적으로 처리해야 할 상품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안락사(혹은 존엄사) 역시 중요한 이슈로 등장한다.
모든 예술적 지평에는 비탄과 애도, 죽음의 편린이 깊숙이 뿌리내려 있으며, 대중은 공포 영화나 법의학자라는 가공의 인물에 열광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죽음은 대개 위로의 온기를 결여한 채, 산 자의 영혼에 닿지 못하는 허망한 ‘죽음의 유희’일 뿐이다(p.166).
상실과 소외가 심화할수록 위로의 필요성은 커지고 위로는 사회 유지의 중요한 축이 된다.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행위일 수 있다. 위로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내가 겪지 않은 불행에 안도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탈리는 이를 ‘이기적 이타주의’라고 부른다.
위로 역시 근본적으로는 이기적인 행위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이를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이미 위로를 주기도 한다. 이것을 ‘이기적 이타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다른 이를 도우면서, 내가 행할 수 있는 선과 다행히 내가 겪지 않아도 되는 불행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다(p.184).
아탈리는 궁극적으로 ‘위로가 필요없는 사회’라는 실천적 대안을 제시한다. 고통이 닥친 후에 달래는 소극적 위로를 넘어, 죽음으로 인한 고독과 상실에 무너지지 않도록 사회적·제도적 안전망을 구축하고 마음의 면역력을 키우는 ‘예방적인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할 수 있는 한 자주 사랑한다고 말하고, 슬픔이 덮쳐 오기 전에,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오기 전에, 아무런 대가 없이 미리 위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위로가 슬픔에 대한 최선의 답은 아니다. 위로는 단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함을 받아들여야 할 때 필요한, 불가피한 응답일 뿐이다(p.196).
『위로의 역사』는 당신은 지금 어떤 방식으로 위로받고 있으며, 누구를 위로하고 있는지 묻는다. 신과 거대 담론이 사라지고 위로가 상품화되는 시대에, 기술과 물질이 해결하지 못하는 인간 근원의 실존적 고뇌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위로의 역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