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대한민국의 뿌리는 어디인가.
‘박정희도시‘로 각인된 구미.
구미는 박정희라는 한 인물이 창조한 신도시가 아니라 조선 성리학의 뿌리였고 신라 호국 불교의 첫 포교지였다.
‘박정희도시‘로 각인된 구미.
구미는 박정희라는 한 인물이 창조한 신도시가 아니라 조선 성리학의 뿌리였고 신라 호국 불교의 첫 포교지였다.
지금 이 시점에서 ‘왜 구미인가?’하며 궁금해 할 수도 있다.
구미를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철지난 듯이 여겨지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공과를 논하거나 그 시대를 그리워하거나 혹은 보수와 진보간의 이념과 진영싸움에 뛰어들려는 것이 전혀 아니다.
박정희 시대가 오래된 역사의 한 장(章)으로 기록된 지 이미 45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그 시대가 갖는 의미에 대해 되짚어보거나 끄집어내는 것조차 두려워하거나 경계하고 경기를 일으키는 과민반응에 사로잡혀 있는 세력들의 존재로 인해 불편하다.
〈거대한 뿌리 구미〉는 박정희 시대 뿐 아니라 야은 길재 선생 등 구미에서 비롯된 조선성리학의 뿌리를 발견해내고 신라불교의 첫 포교지인 구미를 확인해내는 작업을 통해 구미가 사실상 대한민국을 이끈 정신적 근원이자 뿌리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외면하고자 해서 역사적 사실이 묻히거나 알려지지 않아서는 안된다. 회색빛만 감도는 칙칙한 공업도시, 산업도시로만 각인된 구미는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한국인의 정신을 형성하게 해 준 토대였다. 다만 우리가 그동안 구미라는 도시에 대한 선입견을 뿌리치지 못한 것이 구미를 박정희가 만든 산업도시라는 이미지로만 각인하게 했을 뿐이다.
한 국가의 뿌리는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쉽게 바꾸거나 뽑아내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도 하지 않았던가.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것에 박정희라는 한 정치지도자의 고향과 그의 궤적을 쫓아 ‘박정희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려는 케케묵은 정치적 의도는 추호도 없다.
우리는 이번 여정을 통해 구미가 우리의 오랜 과거였고 현재이자 미래라는 점을 확인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구미(선산)에는 부족국가형태의 소국이 있었고 그들이 신라에 병합돼 지방호족으로 살아남아 신라에 복속된 후 ‘신라불교초전지‘로서 호국불교의 전초기지 역할을 당당히 자임한 바 있었다.
한국문화의 정수인 유교문화는 고려말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인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구미 금오산자락에서 널리 인재를 모아 성리학을 가르치면서 조선사대부를 양산하면서 기틀이 잡혔다. 흔히들 퇴계 이황이 성리학을 완성했다고 하지만 조선사림(士林)을 형성하게 한 절대적인 功 은 길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택리지의 이중환이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고 한 당시 영남인재의 산실이 길재의 금오학당이었다.
그 후 오랫동안 낙동강변의 작은 한촌(寒村)이던 구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박정희의 산업화 공업화 프로젝트였다. 그는 자원이 없는 이 나라가 살 길은 수출 밖에 없다며 ‘수출입국‘을 내세워 구로공단을 세우고, 마·창수출자유지역을 조성하고 구미에 산업단지를 만들었다. 국비로 지원하는 금오공고 등 전국에 공업계고등학교를 설립, ’공업입국‘을 위한 기본인재들을 양성했다. 박정희에겐 구미가 테스트베드였고 실험장이었던 셈이다.
구미를 통해 재확인한 것은 박정희가 자신의 고향에 특혜를 주기위해 구미에 산업단지를 조성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낙동강이라는 풍부한 산업용수와 대구 등 인근지역의 풍부한 우수인재확보, 투자재원 및 ‘하면 된다‘ 는 의지 등을 감안한 포석이었다.
〈거대한 뿌리 구미〉를 통해 우리는 박정희를 그리워하거나 그 시대를 기억하려는 ‘박정희노스탤지어’를 되살리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다만 박정희라는 이름 석 자를 꺼내기만 해도 악마화하거나 반감을 표출하는 진영에 대해 이제 그의 공과를 차분하게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조언하고자 한다.
중국은 문화대혁명과 대기근 등의 인류역사상 최악의 참사를 일으킨 마오쩌둥(毛泽东)에 대해 ‘공칠과삼’(功七過三)으로 평가하고 그를 역사속에 박제했다. 공이 훨씬 더 많다는 명분으로 마오쩌둥은 오늘도 베이징 텐안먼 광장을 지키고 있다. 아니 온 중국인민이 오히려 ‘오늘의 중국 G2’를 만든 최대공로를 인정, 아예 ‘재물신’으로 추앙하기까지 한다.
박정희에게 그런 대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가 옳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의 공과와 아픔을 모두 우리는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대한 뿌리 구미〉를 통해 구미를 다시 보고 구미 속에 살아있는 박정희를 불편하는 대신 앞선 시대로 돌아가 산업화·근대화가 얼마나 절실한 과제였는지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존재이유는 될 것 같다.
구미를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철지난 듯이 여겨지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공과를 논하거나 그 시대를 그리워하거나 혹은 보수와 진보간의 이념과 진영싸움에 뛰어들려는 것이 전혀 아니다.
박정희 시대가 오래된 역사의 한 장(章)으로 기록된 지 이미 45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그 시대가 갖는 의미에 대해 되짚어보거나 끄집어내는 것조차 두려워하거나 경계하고 경기를 일으키는 과민반응에 사로잡혀 있는 세력들의 존재로 인해 불편하다.
〈거대한 뿌리 구미〉는 박정희 시대 뿐 아니라 야은 길재 선생 등 구미에서 비롯된 조선성리학의 뿌리를 발견해내고 신라불교의 첫 포교지인 구미를 확인해내는 작업을 통해 구미가 사실상 대한민국을 이끈 정신적 근원이자 뿌리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외면하고자 해서 역사적 사실이 묻히거나 알려지지 않아서는 안된다. 회색빛만 감도는 칙칙한 공업도시, 산업도시로만 각인된 구미는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한국인의 정신을 형성하게 해 준 토대였다. 다만 우리가 그동안 구미라는 도시에 대한 선입견을 뿌리치지 못한 것이 구미를 박정희가 만든 산업도시라는 이미지로만 각인하게 했을 뿐이다.
한 국가의 뿌리는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쉽게 바꾸거나 뽑아내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도 하지 않았던가.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것에 박정희라는 한 정치지도자의 고향과 그의 궤적을 쫓아 ‘박정희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려는 케케묵은 정치적 의도는 추호도 없다.
우리는 이번 여정을 통해 구미가 우리의 오랜 과거였고 현재이자 미래라는 점을 확인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구미(선산)에는 부족국가형태의 소국이 있었고 그들이 신라에 병합돼 지방호족으로 살아남아 신라에 복속된 후 ‘신라불교초전지‘로서 호국불교의 전초기지 역할을 당당히 자임한 바 있었다.
한국문화의 정수인 유교문화는 고려말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인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구미 금오산자락에서 널리 인재를 모아 성리학을 가르치면서 조선사대부를 양산하면서 기틀이 잡혔다. 흔히들 퇴계 이황이 성리학을 완성했다고 하지만 조선사림(士林)을 형성하게 한 절대적인 功 은 길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택리지의 이중환이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고 한 당시 영남인재의 산실이 길재의 금오학당이었다.
그 후 오랫동안 낙동강변의 작은 한촌(寒村)이던 구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박정희의 산업화 공업화 프로젝트였다. 그는 자원이 없는 이 나라가 살 길은 수출 밖에 없다며 ‘수출입국‘을 내세워 구로공단을 세우고, 마·창수출자유지역을 조성하고 구미에 산업단지를 만들었다. 국비로 지원하는 금오공고 등 전국에 공업계고등학교를 설립, ’공업입국‘을 위한 기본인재들을 양성했다. 박정희에겐 구미가 테스트베드였고 실험장이었던 셈이다.
구미를 통해 재확인한 것은 박정희가 자신의 고향에 특혜를 주기위해 구미에 산업단지를 조성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낙동강이라는 풍부한 산업용수와 대구 등 인근지역의 풍부한 우수인재확보, 투자재원 및 ‘하면 된다‘ 는 의지 등을 감안한 포석이었다.
〈거대한 뿌리 구미〉를 통해 우리는 박정희를 그리워하거나 그 시대를 기억하려는 ‘박정희노스탤지어’를 되살리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다만 박정희라는 이름 석 자를 꺼내기만 해도 악마화하거나 반감을 표출하는 진영에 대해 이제 그의 공과를 차분하게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조언하고자 한다.
중국은 문화대혁명과 대기근 등의 인류역사상 최악의 참사를 일으킨 마오쩌둥(毛泽东)에 대해 ‘공칠과삼’(功七過三)으로 평가하고 그를 역사속에 박제했다. 공이 훨씬 더 많다는 명분으로 마오쩌둥은 오늘도 베이징 텐안먼 광장을 지키고 있다. 아니 온 중국인민이 오히려 ‘오늘의 중국 G2’를 만든 최대공로를 인정, 아예 ‘재물신’으로 추앙하기까지 한다.
박정희에게 그런 대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가 옳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의 공과와 아픔을 모두 우리는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대한 뿌리 구미〉를 통해 구미를 다시 보고 구미 속에 살아있는 박정희를 불편하는 대신 앞선 시대로 돌아가 산업화·근대화가 얼마나 절실한 과제였는지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존재이유는 될 것 같다.
거대한 뿌리 구미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