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리

모르리

$12.00
Description
관설동 이 층 단칸방
현관 입구 한쪽에 작은 화장실
맞은편 벽에는 싱크대 하나 붙어있다.
침대에서 간신히 일어나 조심조심 화장실에 간다.
하루종일 TV 보는 것이 큰 낙이란다.
TV 옆에는 할머니가 쓴 갈대 시가 걸려있다.
왕진 간 첫날,
의사였던 큰 오빠와 비슷하다며 오빠라고 부른다.
나는 갈대 할머니라 불렀다.
몇 년 전 남편을 보내고 외로워서 시를 써 왔단다.
거미가 실을 뽑아내듯 90년 묵은 삶의 기억들
한 줄 한 줄 공책에 뽑아내어 예쁜 책이 되었다.
왕진의사 곽병은

아흔 한 살 윤을온 시인의 첫 시집이다. 평생 시를 쓰지 않다가 3년 전부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아들이 가져다 준 노트에 틈틈이 시를 쓰기 시작했다.
소박하지만 정갈한 작은 방에서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성찰과 푸념을 이어가면서도 한 글자 한 글자에 정성을 담아 써 내려간 글이 시가 되었다.
인생에서의 즐거움과 슬픔, 아픔을 아무런 기교도 없이 써 내려간 시인의 시에서 때론 쓸쓸함이, 때론 희망과 긍정의 메아리가 돌아온다.
저자

윤을온

시인은1935년서울종로구에서7남매중다섯째로태어났다.청운국민학교와충남당진중학교를졸업했고,6·25전쟁으로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를중퇴했다.
충남의한초등학교에서2년동안교사생활을,서울의보험회사에서2년여동안교육강사로일한후원주에서오랫동안천석갈비식당을운영했다.23살에결혼해슬하에2남을두고있다.시인의첫시집이다.

목차

프롤로그 4
갈대할머니와의인연

아흔하나을온씨,시를만나다
청춘은늙지않는다 15
갈대 18
할미꽃 20
노송나무 22
창조주 24
옥색바다 26
연꽃 28
거미 30
상고대 32
폭포 34
아사리판 35
마음의비 36
태산이모인곳 38
청춘의영혼 40
첫눈 42
겨울은행나무 44
인정받는삶 46
10분보다5분이긴하루 48
가슴속외마디그림 50
우도의울음 52
도는세상 54
뒷모습 56
운무 58
빈손 59
모르리 60
청진기는옥수 62
천년노송 64
정 66
방구 68
물냄새 69
가지나물 70
무념 71
천국에계신어머님께 72
대추나무 74
대문없는문패 76
에필로그 78
인생열차

해설 84
거미와청진기

출판사 서평

해설-시인권오영

거미와청진기
홀연히‘처음’의시간속에있는것.그러므로모르는자리로다시돌아가는곳.시는‘없음’에서‘있음’의자리로돌아오는곳에서탄생한다.시는귀결이아니라,존재에대한‘질문’으로남는것이다.“나는누구인가?”라는끝없는‘질문의시작’속에서시는태어나고자란다.“나였던그아이는어디있을까?”라는질문이시작된다면,그질문에이어그아이는“내안에서사라졌을까,아니면,아직내속에남아있을까?”라는질문을남긴다.시는근원에대한,다시말하면‘처음’으로돌아가는그막막하고낯선곳으로돌아간다.그리하여시적질문은사물에대한느낌과생각으로싹이트는‘순간’을맞이하게된다.

타고보니급행열차였지
이열차는어떤철로를달릴까?
설레며궁금도했었지
자연이주는선물은천태만상
차창밖에스쳐가는자연을
감상조차못하게달렸고
자연이주는명소도그냥지나고
굽은길을지날때
내몸은굽은대로흔들려중심을잃었고
순간순간긴장하기도했었지
스쳐가는길위에아픔도있네
산허리를감싸안은구부러진철길
내몸은좌우로흔들리고
곧은철길이다가오겠지 -윤을온,「인생열차」부분

언어는공기처럼투명하고자연스러운매체이다.시인윤을온은‘지나간다’라는자의식이‘지나가는’밖을응시하는자리에앉아있다.시선이고요하다.시인의자의식이없었다면풍경을표현하는것에그쳤을지모를‘열차’에대한사유가신선하다.그사유는들떠있지않다.“이열차는어떤철로를달리고있을까?”라는질문이시작되는시의출발점은낯선곳으로,홀연히‘처음’의시간으로돌아간다.“차창밖에스쳐가는자연을”,보고,느끼고,생각하는‘처음’인열차안,어느좌석의창가에서시인은‘휘어진길’과‘곧은길’을동시에본다.‘지나가는’시간을바라보는시인이던지는질문이시작되는“어떤철로를달리고있을까?”는‘중심’과‘긴장’사이를횡단하고있다.시인의믿음은‘곧은길’에귀착된다.
‘굽을대로굽은’길위에서‘좌우’로흔들리는시인의올곧음은,자본의시대가낳은폭주시대열차안에서모든것을감싸안는다.

사대부조상의형식을갖춘묘
양지바른묘비를의지하며핀할미꽃
신비하며살짝만져보니
회색빛솜털옷을입고속옷은자주색
노란색으로씨방을갖고
굽은허리로꽃씨를날린다
(중략)
삶에필요한모든조건을해결해주는
요양보호사님이있기에너를사랑할수있어
오늘밤비석의주인과하루에사연을
속삭이겠지
잘자,안녕,할미꽃 -윤을온,「할미꽃」부분

언어는다른예술의질료보다그것의총체를훨씬선명하게드러낸다.먼바다수평선자락을손가락끝으로끄집어서서히당겨오는느낌으로,그막막한바다의수평선위로배한척이올라오는느낌으로다가오는것이시라면,윤을온시인의‘할미꽃’이그렇다.정제미가느껴지는시적울림속에특별한기교나화려한수사학이없이표현된이미지가주는생동감이현란하지않다.“회색빛솜털옷을입고”에서시인이보는‘시적발견’은삶에대한성찰로이어진다.태초인대지와하늘과맞닿은죽음,즉‘조상의묘’사이에서숙연해지게만드는‘굽은허리’의할미꽃에자신의삶을투사시켜바라보는시인의시선이정갈하다.시의씨앗이발아되는시저지점에들어앉은‘씨방’을바라라보는시인은이제속삭인다.“잘자,안녕,할미꽃”이라고.

밤새내린이슬비는거미집에입주한것을
축하하듯은방울방울방울영롱한빛을
내며바람에살랑인다
다음날치마에매달린거미줄에아기거미
탄생하고어미거미는힘겹게움직인다
모성애인듯애처롭기까지하다
며칠후아기거미사라지고어미거미가운데
매달린채거미줄도몇줄기끊어지고헌집이됐다
거미가헌옷벗고새옷입고살아가면좋으련만
그대로생을마감한다 -윤을온,「거미」부분

시는자신과의싸움이클수록농밀해진다.시속에무슨대단한이야기를하려들지않을수록시적울림은커진다.좋은글은자신이쓰는것이아니라,자신을통해인생이쓰는것이기때문이다.시인은“이슬비는거미줄에입주한것을”에서세상과의소통로를열어준다.“방울방울영롱한빛”이한삶의인생을축하해주듯이안과밖의경계를이어주는매개체를‘이슬’로치환한다.인생의격랑을‘바람’에비유하여,시적자아가“치마에매달린거미줄에아기거미탄생하고”라는구절에서시인은자신만의인생길을개척해나가는모습을‘거미줄’을통해보여준다.이세상은모든인연으로엮여져있다.‘거미줄’처럼엮인인드라망因陀羅網의세상.서로가서로에게연결된인연들이모여끝없는길을내는세상의이치를낮은목소리로노래한다.‘거미줄’을통해자신의삶을‘이슬’과‘방울’을통해바라보는시선이단아하다.

눈뜨면아픔과두려움이
6.25전쟁과구십평생살아왔네
없어졌던왕진제도다시오고
왕진오신원장님의청진기는생명
청진기는옹달샘의옥수
찢어지고상처난곳에
여기저기갖다대면옥수되고
치료되네
옥수는생면이고사랑이고
존경이다 -윤을온,「청진기는옥수」전문

‘청진기’를통해이어주는‘아픔’과‘치료’로귀결되는시인의삶의방식은건강하고긍정적이다.어떤글이든인생의밑바닥에가닿아야한다.자본주의폭주열차시대에동승한시인은흔들리며,흔들리지않는다.그것은삶을자켜내려는자신의의지가‘중심’에가닿아있기때문이다.자본주의가상징하는아파트입구에대고시인은절하지않는다.위선과거짓앞에시인은무릎을꿇지않는다.진실을배반할때진실은자신도자신을도울수없다.말하기위한말은소음에그칠뿐이다.인생길이라는말이있듯이글도,시도인생글이다.우리가하는말에인생전체가걸려있어야한다.모든인생에‘청진기’를갖다대듯이시도그래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