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밤, 영도 (정미형 소설)

검은 밤, 영도 (정미형 소설)

$16.00
Description
오래된 기억의 공간에서 흩뿌려진 물방울들
현재라는 시간에 잉크처럼 스미는 이야기
정미형 소설가가 세 번째 소설집 『검은 밤, 영도』를 펴냈다. 2009년 봄 상반기 《한국소설》 신인상에 단편 「단신의 일곱 개의 가방」이 당선되며 등단한 정미형 소설가는 ‘제11회 현진건문학상’, ‘제25회 부산소설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검은 밤, 영도』는 “이중 혹은 다중시점으로 서사를 끌어가면서도 매끈하게 마무리했고, 세대를 달리하는 가족 구성원의 삶에 대한 정념과 의식을 인간학적 깊이로 이해했다”고 평가받은 「남원 어딘가에」를 포함해 2020년부터 2024년까지 집필한 7편의 단편이 담겼다. 실제 지명인 영도, 남원, 언양의 구체적인 장소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잊힌 시간에서 다시금 찬란하고 조용히 비추는 삶의 뒷모습을 담아내는 정미형 소설가 특유의 시선이 빛을 발한다. 소설이 할 수 있는 최고이자 최선의 위로가 독자들에게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소설들이다.
저자

정미형

1963년진해에서태어나부산에서성장했다.부산대학교생물학과를졸업했다.
2009년《한국소설》에「당신의일곱개가방」을발표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
이후계간《작가와사회》,《좋은소설》등에다수의단편을발표했다.
‘제11회현진건문학상’,‘제25회부산소설문학상’등을수상했다.

목차

남원어딘가에
산책하는순간들
검은밤,영도
월내역을지나서
겨울,언양
뼈이야기
에밀리의시선

발문(배이유,소설가)
오래된기억의공간으로부터흩뿌려진물방울들이
―『검은밤,영도』에관한소고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노선을모르는오래된버스가와서어느시간과공간으로나를던져놓는것,
소설속장소는낯설고새로운공간속을의미한다고할수있을것이다.
―‘작가의말’중에서

정미형소설가는이번소설집을“가방을끌고어딘가로떠나면서쓴여행기”라고표현한다.노선을모르는오래된버스를타고불시착한낯선공간에서,독자들은예기치않은삶의진실과마주하게된다.독자들은예상치못한여행기를통해소설이주는정념과관념을발견하게될것이다.
이번소설집은‘시간’이라는열쇠로과거의공간을현재로불러온다.소설속영도,남원,언양은단순한배경을넘어실제와상상의이중세계로변모한다.
발문을쓴배이유소설가는“흰천에문장이라는바늘로촘촘히수를놓”는“세밀한자수공예가의시선”이라며,정미형소설가가가진섬세하고다중적인시선을짚어냈다.먼지처럼바스러지는삶과희미한유령같은사람들을불러내어,그들의생에새겨진지문을질긴의지로읽는다.오래된기억의공간에서흩뿌려진물방울들이현재라는시간에잉크처럼번지며스며드는방식,이것이정미형소설이독자에게말을건네는방식이다.

소설집을관통하는정서는‘검은밤’같은어둠에서도기어이찾아내는은은한온기다.표제작「검은밤,영도」에서칠흑같은어둠속가난한젊은새댁에게위안이되어준이웃집의비싼전깃불처럼,작가는고단한삶의두려움을헤쳐나가는힘을포착한다.등장인물들은대부분잃어버린것을찾아나서거나지나간기억을더듬는여성들이다.그녀들은막다른길의끝에서“잘못도착했다고여겨지던길이어쩌면진짜찾던길일지도모른다”는역설적인희망을발견한다.죽은자로서생을바라보는연극속‘에밀리의시선’처럼,소설속인물들은지나가버린일상의찬란함을뒤늦게,그러나사무치게깨닫는다.정미형소설가는그회한과그리움의정서를중심으로단단한위안을건넨다.

「남원어딘가에」의이효신은시댁제사를위한제기를구하러홀로남원운봉장을찾는다.손윗동서로부터제사를떠맡게된쉰살의이효신이물푸레나무제기를마련하는과정과제기가딸은선에게전해지기까지삼대에걸친여성들의삶이교차한다.정성들여차린추석차례상앞에서이효신이기다린것은동서의한마디고마움이었지만,정작그제기는며느리들에게거부당하고택배박스에담겨집집을떠돈다.작가는제사와제기라는한국전통문화의상징을통해여성들의삶과가족관계의변화를섬세하게그려낸다.이효신이“남원어딘가”를배회하며우연히목기장인을만나기를기다리는모습은삶의의미를찾아헤매는현대인의은유다.전통적가족제도와여성의역할이급격히변화하는한국사회에서,제사음식의냄새와제기의질감등감각적묘사는독자를그시대로생생하게안내한다.

「산책하는순간들」속도영은낯선원룸에서한달살기를하며산책중우연히블로그‘은빛토끼’를발견한다.지역맛집과카페를검색하다만난이블로거의일상을따라가며,도영은그가추천한식당을찾아가고같은물건을사면서간접적으로그의삶에개입한다.애착이불을가져본적없고어떤것에도깊이집착하지않았던도영에게,얼굴도모르는은빛토끼는생애처음가진‘애착대상’이된다.정미형은SNS시대의관계맺기,익명성속에서의친밀감,알면서도모르는관계의역설을탐구한다.도영이은빛토끼의수술소식을걱정하면서도댓글조차남기지않는모습은현대적거리두기의한형태다.

표제작「검은밤,영도」속혜주는팔십대고모로부터오십년전영도에서살았던이야기를듣는다.남편이미군배를타러떠난후,전깃불도없는낡은집에서세딸을홀로키워야했던고모에게유일한위안은밤새켜져있던이웃선생님댁의불빛이었다.“뒷집에혼자딸들을데리고살고있는젊은여자가전깃불이없는밤에얼마나무섭겠냐고”일부러불을켜두었다는선생님의배려.오십년이지나도록감사를전하지못한고모는조카혜주에게라도그이야기를남기고싶어한다.정미형은‘검은밤’이라는어둠과‘불빛’이라는희망의대비를통해고독과연대의이야기를풀어낸다.표현되지못한감사와사랑이어떻게삶을무겁게하는지,과거의기억이현재에도여전히생생하게작동하는방식을섬세하게그려낸다.‘영도’라는실제지명을사용하면서도그곳을거의신화적공간으로재구성하여,검은밤의영도를공포와고독의장소이자동시에인간적온기가발현되는곳으로형상화한다.

「월내역을지나서」의문숙은매주무궁화열차를타고태화강역까지초크아트를배우러간다.열차안에서만난목걸이를한두늙은여자는친척의비리문제를해결하러가는중이고,친구M은이십오년전직장내성추행사건을문제삼으려한다.쉰을넘긴문숙은새로운일을시작하려는사람이고,월내,남창,덕하역을지나며과거와현재,개인사와사회적이슈가교차한다.M이제기하는황차장의성추행문제는미투이후한국사회의변화를반영한다.“아무것도모르던때”라는문숙의말은과거에는문제로인식되지않았던것들이이제는문제가되는시대적변화를보여준다.하지만가해자가암투병중이라는사실앞에서정의와용서사이에서고민하게되는지점이현실적이다.무궁화열차라는느린이동수단과정차하는역들은삶을되돌아보는시간을상징하며,목걸이에서반사되는빛,콩떡을먹는늙은여자들의대화등사소한디테일로열차안풍경을생생하게구현한다.

「겨울,언양」속요리교실을운영하는훈정은대학시절연일과함께언양작천정을다녀온기억을떠올린다.대학신문취재를위해갔지만대담자를찾지못하고헤맸던그여행.연일은어머니를찾고있었고,훈정은무언가를찾고있었지만정작무엇인지몰랐다.겨울작천정에서모닥불을피우고,낯선여관에서하룻밤을보낸후받지못한연일의편지.그‘실패한’여행이이십여년후요리사가된훈정에게의미있는기억으로남는다.“이곳과저곳,막혔던막다른길의끝에또다른길이열리는것,잘못도착했다고여겨지던길이어쩌면진짜찾던길일지도모른다”는문장이작품의핵심이다.작가는인생의우연과실패,잘못된선택들이실은다른방식으로우리를형성한다는것을보여준다.어머니의방앗간이야기,훈정이찾지못했던이름모를향신료,현상되지않은사진등은모두‘찾지못한것들’이지만,그것이오히려삶의방향을결정했다는역설을담고있다.

「뼈이야기」는아흔한살시아버지가화장된후,팔십대시모술이는뼈항아리를집에가져오고싶어한다.“밥한공기정도되더나?”라고뼈의양을묻는술이에게,남편의뼈는육십년결혼생활의물질적증거이자표현되지못한감정의응어리다.죽음앞에서한마디작별인사도하지않은남편에대한서운함과,그럼에도뼈항아리를곁에두고싶은애틋함이공존한다.술이의회상을통해한국여성의이십대부터팔십대까지의삶이파노라마처럼펼쳐진다.은행원시절,참물아이라불리던새댁시절,제사준비,시댁어른봉양,그리고남편의임종까지.작가는한국현대사를살아온여성의생애사를뼈를중심으로재구성한다.죽음과제사라는무거운주제를뼈항아리라는구체적사물로형상화하며,술이가뼈항아리를새장처럼여기고햇볕을쐬게해주는장면은기이하면서도애잔하다.여러세대의죽음들(시아버지,시고모,작은시아버지,영미엄마)을겹쳐놓으며죽음의반복성과각각의특수성을동시에보여주는깊이있는작품이다.

「에밀리의시선」속지은은대학시절본연극〈우리읍내〉의에밀리역을맡았던동기주희를잊지못한다.손턴와일더의이연극에서에밀리는죽은후삶으로돌아와“너무아름다워그진가를몰랐던이승”을깨닫는다.이십이년만에우연히건널목에서주희를본것같은순간,지은은자신의평범하고안정적인삶을되돌아본다.무대위의주희가가졌던‘에밀리의시선’,즉삶을객관적으로바라보고그가치를깨닫는시선에대한동경이되살아난다.
K와의이별,발레를그만둔일등지은의선택들은모두경제적안정을위한것이었다.하지만주희라는기억,에밀리의시선은‘다르게살수도있었을’가능성에대한그리움으로남는다.작가는연극이라는메타적장치를소설안에끌어들여삶과예술의관계를성찰한다.무대와객석,과거와현재,실제주희와기억속에밀리가중첩되며복합적시간성을구현한다.세실마을이라는신도시의일상적공간(제과점,백화점,건널목)이어느순간연극무대처럼변환되는지점이인상적이며,“우리는함께살아있다는것을확인하기위해서라도자주만나서밥을먹어야”한다는깨달음으로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