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이여 안녕 (어느 젊은 예술가의 초상)

물질이여 안녕 (어느 젊은 예술가의 초상)

$20.00
Description
버려진 것, 죽은 것, 무너진 것과 다시 관계 맺는 법
『물질이여 안녕, Ave Materia』을 관통하는 것은 단 하나의 동작이다. 파괴된 것을 밀어내지 않고, 그 위에 손을 얹는 것. 무너져가는 집, 곰팡이 슨 그림, 죽은 화가의 작업, 실패한 삶의 시도들. 저자는 이 모든 것을 "고쳐서 원래대로 돌려놓는" 대신, 그 상처와 흔적을 재료 삼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물질에는 영혼이 있다. 낡은 나무의 결, 흙, 바닷물은 소재가 아니라 대화 상대다. 파리의 낡은 집 지하실에서 14년째 방치된 채 곰팡이가 슬어 있던, 이미 세상을 떠난 화가의 그림을 발견했을 때 그는 그것을 복원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손끝으로, 지문으로 그 위에 이어 그렸다. 물질 자체가 기억과 영혼을 품고 있기에 그와 손을 마주 잡고 대화를 이어 간다. 물질에게 건네는 다정한 인사와 함께. 그리하여 “망해버린 그림에도 이유가 따른다”는 현재를 살아내게 하는 주술처럼 가볍지만 무겁게 울린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들 앞에서 독자는 곧 이 책의 두 번째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 완성이란 무엇인가. 이 책에서 완성은 끝이 아니다. 부다페스트에서 24시간 동안 그린 그림은 완성되자마자 땅에 묻혔고, 두 달 뒤 세계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숟가락으로 흙을 파내 다시 꺼냈다. 프랑스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완성한 그림은 노르망디 바다에 그대로 흘려보냈다. “완성 = 소유”라는 통념을 뒤집는 이 행위들 속에서, 작품은 태어나고 흙과 물에 의해 변형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다. 그 순환의 과정 전체가 작품이 된다.

고통은 지워지지 않아도,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물질이나 예술이 아니라, 한 사람이 통과한 시간이다. 초월은 고통의 소멸이 아니라, 고통과의 공존이라고 말한다. 한국에서의 좌절과 방황, 그가 “죽는소리”라 부르던 시절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구덩이에서 덩굴이 자라듯, 지금의 창작이 거기서 자라났다. 이것은 극복의 서사가 아니다. 상처를 이겨내고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상처를 곁에 둔 채로 계속 살아가고 계속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곰팡이 슨 캔버스, 땅에 묻힌 그림, 바다로 떠나보낸 마지막 작업. 이 낯선 장면들이 결국 가리키는 곳은 지극히 익숙한 자리다. 무너졌다고 해서, 끝난 것은 아니다. 물질과 손끝으로 나눈 10년의 대화 끝에서, 이 책은 그 사실 하나를 조용히, 오래 남는 방식으로 증명한다.
저자

형린

형린 Lynn Hyeong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대예술 분야 연구원으로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개관 준비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한 뒤, 2015년 파리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후 파리 15구의 오래된 집 '르 라브 라브(Le Lab Lab)'에서 회화, 설치, 공연을 아우르는 창작 활동에 몰두하며, 파리 8대학교 조형예술학부 '예술과 미디어를 통한 에콜로지' 학과에서 생태예술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작업은 파리, 부다페스트, 소피아, 런던, 타이중 등지의 전시와 프로젝트로 확장되었으며, 생드니의 창작 커뮤니티 [60AdaDa]의 일원으로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파리의 갤러리 '앙프레시옹(Impressions)'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동명의 연구서를 예술 작품으로 구현했다.
현재 형 린은 대만 타이중 동해대학교의 강사이자 레지던시 아티스트로서 현대예술을 강의하고 있다. 삶의 구원과 환희를 전하는 예술의 본질적 물음을 중심에 두고, '르 라브 라브 2(Le Lab Lab 2)'로 명명한 작업 공간과 강의 자체를 하나의 예술적 실천으로 확장하고 있다.

목차

1 장. 미지의 세계로 데려가는 미지의 기술
1. 젊은 예술가의 초상
2. 사그라든 심원의 불씨로부터
3. 새로운 생, 새로운 세계를 낳는 태동
4. 집 속의 집, 르 라브 라브 Le Lab Lab

2 장. 흰 날갯짓의 파동을 따라서
1. 살갗을 스치는 무수한 흰 날개들
2. 죽은 자와 촉각의 대화
3. 이 경이로운 물질의 나라

3 장. 만지고 만져지는 사물들의 촉수 속
1. 혼돈을 타고, 뚫고 나오라
2. 세계를 맞아들이는 환희
3. 소리의 사원에서

4 장. 결국 사랑을 말할 수밖에
1. 무지개의 약속
2. 중세의 방을 지키는 눈동자

5 장. 바닷길로 먼 항해를 떠날 때
1. 깊음, 기쁨과 기품이 있는 곳으로
2. 시간의 물결 속으로 보내는 나무 그림

출판사 서평

“나는 손가락으로 색을 어루만지며, 그 색의 힘 속에 빨려 들어갔다.”
서른둘의 나이에 한국을 떠났다. 파리에서의 8년. 그녀는 손끝에서 다시 태어난다. 『물질이여 안녕』은 생사의 투쟁 속에서 흔들리던 시간을, 창작을 통해 돌파해 온 과정을 담았다. 예술이라는 가능성의 장에서 ‘살아 있음’이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변신의 서사를 펼쳐낸다.
물질이 말을 건다는 것, 그림이 스스로 태어난다는 것. 형린의 예술 세계는 우리가 잊고 있던 물질의 영혼을 깨운다. 진동하는 색. 버려진 사물, 잊힌 화가와 영혼의 만남, 고독과 몰입, 자신만의 장르를 개척하는 과정을 작가의 작품 사진 100여 컷과 함께 담아냈다. 트라우마와 정신적 고통, 이방인으로서의 생존,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려는 인간의 폭풍 같은 변신의 서사는 독자에게 창작의 환희와 진동을 고스란히 전한다.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것들에게 바치는 인사, 물질이여 안녕.

“예술이 아니었다면 끝내 세상에 매개될 수 없었을 사람. 예술이 사람을, 사랑을 구원한다는 것은 진짜다.”

파리 15구 막다른 골목, 지붕에 구멍이 뚫린 채 105년을 버텨온 집, 저자는 이 집을 "르 라브 라브(Le Lab Lab)"라 부르며 8년을 살았다. 이 책은 그 집에서 일어난 일들의 기록이다. 정원 지하실에서 발견한, 이미 세상을 떠난 인도 피리 연주자의 방치된 그림들을 되살려낸 영혼의 협업. 코로나 봉쇄 속에서 나눈 이방인 아티스트들과의 교류. 그리고 마침내, 오래된 나무판에 그린 그림 한 점을 노르망디의 바다에 흘려보낸 순간까지 창작과 실험,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을 컬러 도판 100여 컷과 함께 담아냈다.

8년의 여정, 그림 한 점을 바다로 흘려보내다

2024년 5월, 저자는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작업 〈슬픔이여 안녕, Plus de Chagrin〉을 완성한다. 버려진 나무 마룻바닥에 수개월간 빗물과 물감을 섞어 만든 이 그림을, 그는 노르망디 해안(북위 48도 59분 28.7초, 서경 1도 33분 57.8초)에 직접 놓아 바다로 떠나보냈다. "그것을 바다에 보내는 순간, 예술은 소유가 아니라 순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장면을 끝으로 파리에서의 여정은 마무리되고, 저자는 삶의 무대를 대만으로 옮긴다.

철학에서 예술로, 그리고 사랑까지

책에는 2015년 파리에서 만난 대만인 사진작가 마이크(Mike Ou)와의 사랑, 그리고 2019년 결혼에 이르는 과정도 담겨 있다. 그렇게 저자는 이 세상에 '매이는' 기쁨을 배운다. "예술이 아니었다면 끝내 세상에 매개될 수 없었을 사람. 예술이 사람을, 사랑을 구원한다는 것은 진짜다"라는 저자의 고백이 책 전반을 관통한다. 가족들조차 믿기 어려워했던 그 결혼은, 떠돌던 삶이 마침내 한 장소와 한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매이는' 이야기로 완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