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사산비명 상하 세트 (전 2권)

정주사산비명 상하 세트 (전 2권)

$54.00
Description
최치원(崔致遠, 857-?)이 쓴 ‘사산비명四山碑銘’에 대해 석전 정호(石顚鼎鎬, 1870-1948) 스님이 한문으로 상세한 주석을 붙인 『정주사산비명精註四山碑銘』을 처음으로 알기 쉬운 우리말로 옮기고 풀어 출간했으며, ‘사산비명’에 대해 세세한 역주와 출처를 모두 밝혀낸 작업은 이 책이 처음이다.
저자

최치원

신라 말기의 학자, 문장가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해운(海雲), 호는 고운(孤雲)이다. 경주 사량부(또는 본피부) 출신이다. 857년(헌안왕 1)에 태어나 868년(경문왕 8) 12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7년 만인 874년에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그 뒤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서 문한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29세 때 신라에 돌아와 시독(侍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신라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지로 나가 태산군ㆍ천령군ㆍ부성군 등지의 태수를 역임하였다. 894년에는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끝내는 승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가야산에 은거하였다.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908년(효공왕12) 말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문창후(文昌侯)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저술로는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금체시(今體詩)》, 《잡시부(雜詩賦)》, 《중산복궤집(中山覆需集)》 등의 시문집과 사서(史書)인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불교관계 글인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석순응전(釋順應傳)》, 《석이정전(釋利貞傳)》 등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만이 전한다.

출판사 서평

1. ‘사산비명’과 『정주사산비명』 개요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귀국한 헌강왕 11년[885] 3월부터 진성여왕 7년[893] 겨울에 이르기까지 네 편의 비문을 지었다. 「지리산 쌍계사 진감 선사 대공령 탑비명智異山雙溪寺眞鑑禪師大空靈塔碑銘」(이하 「진감 비명」), 「초월산 대숭복사 비명初月山大崇福寺碑銘」(이하 「숭복사 비명」), 「숭암산 성주사 대랑혜 화상 백월보광 탑비명崇巖山聖住寺大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銘」(이하 「낭혜 비명」), 「희양산 봉암사 지증 대사 적조 탑비명曦陽山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이하 「지증 비명」)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고대 불교사, 사상사, 신라사, 한문학사, 금석학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인 ‘네 편의 글’을 사찰이 위치한 ‘네 곳 산’의 이름을 따 ‘사산비명’이라 부른다.
종교, 사상, 역사 등과 관련된 전고典故와 단어가 문장마다 배어있는 ‘사산비명’은 쉽게 해독할 수 있는 글이 아니기에 옛 문헌에 밝은 사람이라도 기탁된 의미를 알지 못해 콧잔등을 찡그릴 정도였다. 16세기 후반이래 여러 주석서가 등장해 사산비명을 읽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지만 이설異說이 분분해져 참뜻이 모호해지기도 했다. 이에 근세의 대강백大講伯인 석전 정호 스님이 와전되고 산만한 설명을 바로잡으려 『정주사산비명』을 한문으로 저술했다.


1. 2. 역주譯注의 ‘저본底本’
2. 본서는, 고운孤雲 최치원이 찬술한 사산비명에 대해 석전 정호 스님이 1931년 음력 7월부터 ‘주석注釋’을 달기 시작해 1935년에 완성한 『정주사산비명』(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을 완역한 것이다. 『정주사산비명』 앞뒤 부분에 필사·부기附記 되어 있는 「용주사 주련」, 「대랑혜전大朗慧傳」, 「지증전智證傳」, 「혜소전慧昭傳」, 「교인 계원필경집 서校印桂苑筆耕集序」(홍석주洪奭周 찬), 「(교인 계원필경집) 원서原序」(서유구徐有榘 찬), 매천 황현(梅泉黃炫, 1855-1910)의 칠언 절구 2수, 「최문창 본전(삼국사)崔文昌本傳(三國史)」(『삼국사기』 권 46 「열전 제6·최치원전」의 내용을 요약한 것), 「저술 진전 표著述進箋表」, 「지봉시화智峰詩話에서 인용한 글」 등은 사산비명과 직접 관련이 없기에 번역하지 않았다. 한편, 본문의 「봉암사 지증 대사 적조 탑비명」은 『봉암사 비명』(맑은소리맑은나라, 2024)에 수록됐던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3. 역주의 원칙
첫째, 가급적 쉬운 말로 옮기려 노력했다. 같은 의미의 여러 단어 가운데 가장 쉬운 것을 골랐다.
둘째, 상세한 주석을 달았다. ‘고사古事’와 ‘성어成語’가 ‘비명碑銘’과 ‘주석注釋’에 적지 않게 들어있기 있기 때문이다.
셋째, 불가, 유가, 도가, 제자백가, 음운학 등의 문헌들에 나오는 구절들이 ‘비명’과 ‘주석’에 드물지 않게 인용되어 있다. 그래서 ‘인용문’을 가급적 ‘원문’과 대조했다.
넷째, ‘비명’과 ‘주석문’의 모든 한문 문장에 표점標點을 찍었다. 현토懸吐나 구결口訣이 아니고 ‘표점’을 택했다. 표점이 국제적으로 통용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주석이 있는 역주문’[주석문注釋文]’과 ‘주석이 없는 역주문’을 책에 함께 실었다. ‘주석이 없는 역주문’을 읽은 뒤 ‘주석이 있는 역주문’을 보면 내용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반대로 읽어도 된다.
3. 여섯째, 『정주사산비명』의 협주夾注·두주頭注·각주脚注 등은 ‘각주脚注’로, 역주자의 주석[*를 붙인 번호]은 ‘미주尾注’로 각각 처리했다. 『정주사산비명』의 협주·두주·각주 앞에 각각 ‘협주’·‘두주’·‘각주’라는 말들을 붙였고 큰따옴표[“ ”]로 글의 시작과 끝을 표시했으며, ‘협주’·‘두주’·‘각주’를 우리말로 옮긴 문장 앞에는 ‘역주’라고 표기해 놓았다. ‘각주’에 있는 ‘역주자의 보충 해설’은 이해를 돕기 위해 역주자가 첨가한 것이다.


4. 4. 사산비명 찬술 연도와 비석 건립 연도
최치원이 「비명」을 쓰던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까지의 그 시기는 제49대 헌강왕(?-875-886), 제50대 정강왕(?-886-887), 제51대 진성여왕(?-887-897) 시절로 통일신라가 점차 쇠미해져 892년에 견훤이 무진주武珍州에서 후백제를, 901년에 궁예가 송악군松嶽郡에서 고려를 각각 건립하며 후삼국 시대로 나아가던 그즈음이었다.


5. 사산비명의 주요 내용

1) 「진감 비명」

진감 스님의 생애와 사상은 2,500여 자로 된 「진감 비명」에 집약되어 있다. 중국에서 귀화한 사람의 후손으로, 금마[金馬, 익산]의 최씨 집안에서, 제36대 혜공왕 10년[774]에 태어난 진감 스님은 어린 시절 지극한 효심으로 부모님을 봉양했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인 제40대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로 구도 유학을 떠났다. 창주의 신감 선사를 은사로 득도한 후 제41대 헌덕왕 2년[810]에 소림사의 유리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수계 후 배움을 계속해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아 붉은색이 꼭두서니보다 더 붉고 푸른색이 쪽빛보다 더 푸른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검은 얼굴빛 때문에 ‘흑두타’로 불렸던 진감 스님은, 진리를 찾아 784년에 당나라로 건너갔던 도의 스님을 수행 중 만나, 그와 함께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제법실상의 이치’[佛知見]를 깨달았다. 도의 스님이 제41대 헌덕왕 13년[821]에 먼저 귀국한 후 혼자 종남산에 들어가 3년 동안 지관을 닦았고, 다시 3년 동안 길거리에서 짚신을 삼아 오가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보시행을 실천했다. 제42대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해 상주 노악산 장백사에 머물다 지리산 화개곡으로 옮겨, 삼법三法 화상의 옛 유적지에 당우堂宇를 세웠다. 민애왕이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지리산 남쪽 고개의 기슭에 선실禪室과 육조 영당을 세우고 가르침을 펴자 배우려는 사람들이 벼와 삼처럼 줄을 이었다.
제46대 문성왕 12년[850] 정월 초아흐렛날 해가 뜰 무렵, 문인들에게 “모든 존재·현상의 본성은 텅 비었으며 나는 장차 가려고 한다. ‘한 마음’을 근본으로 삼아 너희들은 노력하라. 탑을 세워 형체를 보존하지 말고 비명에 내 사적을 새기지 마라.”고 말한 뒤 원적에 드니 세수는 77세요 법랍은 41세였다. 금과 옥이 굴러가듯 낭랑하고 고상한 목소리로 범패도 잘했던 선사가 입적하고 36년이 지난 뒤, 제자들의 요청에 응해 제49대 헌강왕은 ‘진감’이라는 시호와 ‘대공령’이라는 탑 이름을 내렸다. 부근에 옥천사라는 사찰이 있어 이름이 중복된다고 하자 정강왕이 ‘쌍계’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남종선의 가르침을 신라에 전파하는 기지 역할을 했던 쌍계사는 안타깝게도 구산선문으로 성장 발전하지 못했다.

2) 「숭복사 비명」

「숭복사 비명」에는 ‘곡사鵠寺’가 ‘대숭복사大崇福寺’로 바뀐 내력과 중수重修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숙정 왕후(肅貞王后, 제38대 원성왕의 비)의 외조부인 파진찬 김원량金元良이 건립한 ‘곡사’는 절 뒤편에 고니 모양의 바위가 있어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다. 원성왕이 승하하자 사찰이 위치한 그곳이 명당으로 판명되었고 논의 끝에 그 자리에 무덤을 조성하게 됐다. 그리고 ‘곡사’는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산23-1번지로 이전되었다.
사찰[곡사]을 (말방리로) 막 옮겼을 당시, 마치 보배로운 다보탑이 땅에서 솟아오른 것 같았지만 규모 있는 격식을 제대로 갖추지는 못했다. 가시덤불을 쳐내고 나서야 비로소 언덕과 산을 구별할 수 있었고 초가집이 뒤섞인 채 비바람을 피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전 후 70여 년을 거치는 동안 임금이 아홉 명이나 급작스레 바뀌어 사찰을 장엄할 틈이 없었다. 제48대 경문왕의 꿈에 원성왕이 나타난 이후 곡사에서 경건한 법회가 거행되었고 사찰도 새롭게 고치기로 결정됐다. 불사佛事가 마무리될 즈음 경문왕이 붕어하자 헌강왕이 즉위해 사찰 조영造營을 완성하고 885년[헌강왕 11] 가을에는 사찰 이름을 ‘곡사’에서 ‘대숭복사’로 변경했다. 고운이 바야흐로 비명을 짓고 있는데 헌강왕, 정강왕이 잇따라 타계하고 진성여왕이 즉위했다. 3,200여 자의 한자에 유려한 문체로 이상의 내용을 담아낸 글이 바로 「숭복사 비명」이다.

3) 「낭혜 비명」

“제국 당나라가 무력으로 황소의 난을 진압하고 연호를 문덕文德으로 바꾸었던 888년, 그해 음력 11월의 달이 이지러진 지 7일 뒤인 22일, 해가 함지에 잠길 무렵 신라의 경문왕과 헌강왕의 스승이셨던 선禪 화상이 목욕을 마치고 가부좌 한 채 원적에 드셨다.”라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낭혜 비명」은 5,100여 자로 이뤄진 상당히 긴 글이다. 무열왕의 8대손인 낭혜 스님은 애장왕 원년[800]에 태어나 진성여왕 2년[888]에 입적했다. 진골에서 6두품으로 강등된 집안 출신으로, 아홉 살 때 처음 학당에서 배우기 시작했고, 눈으로 본 것을 반드시 입으로 외웠다. 그래서 사람들이 ‘해동 신동’이라 일컬었다. 열두 살을 넘기며 ‘아홉 가지 학술·사상’[九流]이 협소하다는 생각이 들어 ‘세속을 벗어난 진리 추구’에 뜻을 두었다. 13세에 설악산 오색석사로 출가해 법성 선사로부터 능가선을 배웠고, 부석산의 석등 대덕에게 화엄을 익혔다.
제41대 헌덕왕 13년[821] 무렵 당나라에 건너가 화엄학을 공부하다 교학의 한계를 깨닫고 선 수행으로 방향을 튼다. 불광 여만 선사를 만난 뒤 마곡 보철 선사에게 나아가 ‘제법실상의 이치’[心印]를 체득했다. 당나라 곳곳을 만행하며 깨달음을 실천하던 중 ‘법난’이 가장 심했던 당나라 무종(武宗, 814-840-846)의 회창會昌 5년[845], 즉 신라 제46대 문성왕 7년에 귀국했다. 당시 소백산에 은거하고 있던 김흔(金昕, 803-849)의 요청으로 오합사[烏合寺, 성주사의 전신]에 주석하며 주변을 교화했다. 동서남북의 먼 지방에서 진리를 묻고자 천리를 반걸음으로 여기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문성왕은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렸으며, 경문왕과 헌강왕은 낭혜 스님을 ‘국사國師’로 모셨다.
장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