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으로
그람시에게진짜문제는,사람들이왜어떤질서를“원래그런것”이라고받아들이는가였다.총칼로지배하지않아도,사람들스스로가그질서를지키고재생산한다면그사회는이미안정된지배상태에들어간다.이것이그람시가말한헤게모니다.헤게모니는강제가아니라사회의동의형태로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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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를통틀어가장많이반복되는오해중하나는혁명이나정권교체가성공하면사회전체가함께바뀔것이라는기대다.우리는이기대가왜번번이어긋나는지이미충분히목격해왔다.제도는바뀌었는데사고방식은그대로이고,법은개정되었는데해석은예전그대로이며,권력자는교체되었는데세계관은조금도흔들리지않는다.이현상을가장정확하게표현한문장이바로“혁명은성공해도문화는저항한다”라는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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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서우리가가장자주범하는착각은싸움이벌어지는장소를잘못짚는것이다.우리는늘눈앞의전선을본다.선거,의회,거리시위,정권교체같은장면들이전부라고생각한다.그러나이런장면은결과가드러나는곳이지결정이내려지는곳이아니다.결정은늘그보다훨씬앞서,그리고훨씬뒤에서이미내려져있다.그지점을안토니오그람시는‘진지’라고불렀다.그진지는언제나전선뒤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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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매일접하는언어는사고의바닥을만든다.‘약자’,‘공정’,‘차별’,‘연대’같은단어는설명없이쓰일수록강해진다.이단어들이어떤선악의방향표처럼작동하기시작하면,사람들은그단어가가리키는쪽으로자연스럽게생각을옮긴다.그람시는이를헤게모니의핵심작동방식으로보았다.누군가를설득하지않아도이미설득된상태를만드는것.일상은그설득이축적되는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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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전쟁은인내를요구한다.성과가바로보이지않기때문이다.그러나진지전의성과는어느순간갑자기나타난다.오랫동안축적된생각이한번의사건을계기로표면위로떠오른다.그때사람들은“시대가바뀌었다”라고말한다.하지만실제로는시대가하루아침에바뀐것이아니다.이미오래전에바뀌어있었고이제야드러났을뿐이다.그람시를우리관점에서다시읽는이유도여기에있다.그는빠른혁명을포기하자고말한것이아니다.빠른승리만으로는충분하지않다고말한것이다.느린전쟁이결정적인이유는,그것이결국모든빠른전쟁의결과를규정하기때문이다.우리가지금준비해야할것은다음선거가아니라다음상식이다.그상식을만드는싸움에서이기는쪽이,결국모든싸움에서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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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가아닌승인을목표로삼으면정치의시간감각도달라진다.단기성과에집착할수없게된다.대신교육,문화,언어같은느린영역을다시보게된다.이영역에서형성된세계관이결국정책의수용여부를결정하기때문이다.우리는이사실을너무오래외면해왔다.이제는인정해야한다.정치는법이전에해석의싸움이며,강제이전에승인에대한경쟁이라는사실을.강제는항상마지막에남는다.그것이정치의출발점이되는순간이미패배가시작된다.우리가추구해야할것은사람들이스스로그질서를지키고싶어지는상태다.이것이그람시가말한헤게모니의핵심이며,우리가다시배워야할정치의기본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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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불리했던이유는여기있다.우리는그동안반복의힘을과소평가했다.한번의강력한메시지,한번의선거승리,한번의정책성공으로흐름을바꿀수있다고믿었다.그러나상대는단기승부를하지않았다.오랜시간교육과문화속에서같은메시지를반복했고,그결과상식의방향을바꾸는데성공했다.람시는이를두고“기동전이아닌진지전”이라고표현했다.전면전에서이기지못하면,참호를파고버티며지형을바꾸는전쟁이다.교육은가장깊은참호다.한세대를건너뛰면패배하지만한세대를붙잡으면승리한다.그래서교육은느리지만결정적이다.오늘의교과서는20년뒤의상식을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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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강요로만들어지지않는다.반복과경험을통해형성된다.그래서느리다.그러나문화가형성된뒤에는제도는놀라울정도로부드럽게작동한다.법을외치지않아도사람들이스스로규칙을따른다.이것이우리가지향해야할상태다.제도가문화를이끄는것이아니라,문화가제도를감싸는상태다.결국정치의성패는제도를얼마나잘설계했는지가아니라,그제도를담아낼문화가준비되어있는지에달려있다.문화없는제도는공허하고,문화가뒷받침된제도는강하다.우리는이순서를거꾸로이해해왔다.이제는바로잡아야한다.문화가제도를감싼다는이단순한사실을인정하면우리의전략은달라진다.제도이전에문화,법이전에생활이다.여기에서헤게모니는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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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우파로서우리가해야할일은단순히반대만하는것이아니다.새로운세대가자연스럽게받아들일수있는세계관을제시하는것이다.자유가왜위험과분리될수없는지,책임이왜처벌이아니라존엄의조건인지,제도가왜의도보다구조를봐야하는지를세대의언어로풀어내야한다.이작업은느리지만한번자리잡으면쉽게무너지지않는다.헤게모니는세대를통해이동한다.오늘의상식은어제의교육이고,내일의정치는오늘의교실에서준비된다.이사실을이해하지못하면우리는계속단기전에서만싸우다지치게된다.세대단위로작동하는구조를인식하는순간,정치의시간표는완전히달라진다.이제우리의싸움은빠른승부가아니라오래지속되는설계여야한다.이것이우리가그람시를다시읽어야하는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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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는교육의도구처럼보이지만실제로는사회가다음세대에게무엇을당연한것으로넘겨줄지를결정하는장치다.법률은바뀔수있고정책은폐기될수있으며정권은교체된다.그러나교과서에실린문장은오랜시간유지된다.그것은시험을통해반복학습되고암기되며평가된다.이과정에서특정세계관은의견이아니라사실의형태로주입된다.교과서는가장조용하지만가장강력한헤게모니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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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들어사회과목에서‘불평등’이가장먼저등장하고,‘시장’과‘자율’이그이후에등장한다면학생의머릿속에서시장은문제의원인으로자리잡기쉽다.반대로시장의작동원리와선택의결과를먼저배우고,이후제도의보완으로서불평등을다룬다면해석은달라진다.내용이같아도순서가다르면의미는완전히바뀐다.좌파가커리큘럼설계에서강점을보인이유는,이순서의힘을정확히이해했기때문이다.그들은무엇을주장할것인가보다무엇을먼저익숙하게만들것인가에집중했다.특정개념을반복적으로앞단에배치하고다른개념은뒤로미루거나선택과목으로돌렸다.이렇게설계된커리큘럼속에서학생은질문하기전에이미방향을잡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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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시장에서성공한개념은자연스럽게교육현장으로이동한다.베스트셀러가교양서가되고교양서가참고도서가되며참고도서가어느순간교재목록에들어간다.이과정은공식적인지시로이루어지지않는다.교수와교사개인의판단,학계의분위기,출판사의마케팅,언론의평가가겹치면서자연스럽게이루어진다.그러나결과는결코가볍지않다.이때부터해당개념은‘배워야할것’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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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서가장흔한착각중하나는‘결정적한방’이역사를바꾼다는믿음이다.선거한번,법하나,선언하나가사회를뒤집을것이라는기대다.그러나실제로사회를바꾸는힘은언제나그보다훨씬작고느린방식으로작동해왔다.하루아침에사람들의생각이바뀌는일은거의없다.대신사소해보이는변화들이반복되고누적되면서어느순간되돌리기어려운상태에도달한다.헤게모니는바로이축적의결과다.안토니오그람시가말한진지전은이느린축적을전제로한다.그는권력을단번에탈취하는기동전보다사회깊숙한곳에서오랜시간쌓이는진지전이더결정적이라고보았다.여기서핵심은규모가아니라빈도다.큰변화보다작은변화가중요하고,한번의승리보다반복되는일상이중요하다.우리가이점을놓칠때마다우리는늘“왜갑자기이렇게됐지?”라는질문을하게된다.그러나갑작스러운변화는거의없다.대부분은이미오래전부터진행된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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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들어보자.어떤정책을두고“이건약자를보호하는제도다”라는말이반복되면,사람들은곧바로정책의세부를묻지않는다.보호라는말이먼저감정을점유하기때문이다.비용은얼마인지,다른선택지는무엇인지,장기효과는어떤지같은질문은뒤로밀린다.이구조는우연이아니다.정책을설명하기전에도덕적위치를먼저선점하는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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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진영이상대적으로강했던이유는개인의재능을즉시검증하기보다환경속에서숙성시키는구조를만들어왔기때문이다.연구보조,번역작업,공동저술,세미나발표같은낮은단계의역할들이자연스럽게연결되어있었다.이과정에서개인은보호받으면서도훈련된다.실패는탈락사유가아니라학습의일부로처리된다.반면우리는종종완성된인물만찾았다.이미말을잘하고,이미논리가정리된사람을무대에세우려했다.이방식은빠르지만공급이늘지않는다.이미완성된인재는늘부족하고한두명에게과부하가걸린다.결국지식전선은몇몇개인의체력에의존하게되고세대교체는끊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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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주목해야할것은특정개념이널리쓰이게되는과정이다.대개그과정은논쟁으로시작하지않는다.오히려논쟁을피하는방식으로확산된다.“이건논쟁의대상이아니다”라는태도를만들어내는순간,그개념은이미상당부분승리한상태다.질문이사라지면검증도사라진다.우리에게불리했던지점은바로여기였다.우리는오랫동안개념을설명해야할대상으로만취급해왔다.상대가어떤단어를쓰면우리는그단어의오해를풀거나정확한정의를제시하려했다.그러나대중정치에서정의싸움은이미늦은대응인경우가많다.단어가먼저작동하고설명은나중에거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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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사고를설계한다는사실은교육과미디어를거치며더욱강화된다.반복적으로노출되는표현은판단의기본값이된다.어떤표현은설명없이도이해되고어떤표현은들리는순간거부감부터생긴다.이차이는개인의지능이나성향문제가아니다.장기간축적된언어환경의결과다.예를들어“이익을추구한다”라는말과“이익만챙긴다”라는말은미묘하지만사고의방향은크게다르다.전자는행위의목적을설명하고후자는인격을평가한다.설명의언어가사라지고평가의언어가남을때사고는분석보다도덕판단으로기울어진다.이때부터정책논의는선악구도로단순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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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과악당의구분도재설계해야한다.문화콘텐츠에서가장흔한오류는세계관을전달하려다인물을도식화하는것이다.그러나단순한악당은사고를자극하지않는다.오히려선택의논리가이해되는인물이필요하다.그가왜그런선택을했는지납득되는순간,관객은자동으로비교를시작한다.이비교가바로세계관학습의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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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주목해야할첫번째원칙은성공을성격의선물로만들지않는것이다.재능,천재성,운명같은요소로성공을설명하면관객은감탄은하지만이해하지는않는다.이해되지않는성공은따라할수없고,따라할수없는성공은세계관을만들지못한다.서사는성공을재현가능한과정으로보여줄때비로소사고를훈련한다.성공을구조로설명하는서사는출발선부터다르다.인물이무엇을잘했는지가아니라어떤선택을반복했는지,어떤규칙을받아들였는지,어떤비용을감수했는지를보여준다.이때성공은한번의도약이아니라누적의결과로나타난다.관객은박수를치기보다고개를끄덕이게된다.“아,저러면저렇게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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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진지전의출발점에서가장먼저정리해야할대상은대중도,정치인도,제도도아니다.지식인이다.이는엘리트주의를말하는것이아니다.사회가어떤방향으로‘자연스럽게’움직이기시작하는최초의층위가어디인지를묻는현실적인판단이다.안토니오그람시가강조했던것도바로이지점이었다.그는권력이무너지는순간보다훨씬이전에사회의사고를조직하는사람들이이미자리를차지하고있음을보았다.진지는먼저여기서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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