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라 물레야 (김학명 시집)

돌아라 물레야 (김학명 시집)

$12.00
Description
"아흔 번의 사계절을 통과했음에도 다시 걸어야 할 길”
생의 끝자락에서 길어 올린 낮고도 선명한 생의 찬가
아흔의 연치(年致)에 이른 시인이 세 번째 시집 〈돌아라 물레야〉를 세상에 내놓는다. 두 권의 시집을 통해 생의 마디마디를 기록해온 노시인은 이제 쉰네 편의 시를 통해 멈추지 않는 시간의 수레바퀴와 그 안에서 순수히 걸러진 생의 정수를 노래한다.

시인에게 ‘물레’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회전하며 실을 뽑아내듯, 기억과 망각,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며 하나의 거대한 운명을 직조해가는 신성한 생의 상징이다. 아흔이라는 숫자가 주는 경외감은 이 시집에서 어떤 비장함이 아닌, 모든 날카로움이 풍화되어 사라진 뒤에 남은 투명한 관조로 승화된다.

이 시집은 세 번째라는 무게감만큼이나 담백하다. 억지로 꾸며낸 수사나 젊은 날의 치기는 증발하고, 오직 사물의 뼈대와 시간의 무늬만이 선명하다. 쉰네 편의 시어들은 인생의 모진 풍파를 견디고 살아남은 단단한 씨앗들이다. 시인은 말한다. 아직 걸어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고. 그래서 이 펜을 도무지 놓을 수가 없다고.

그가 건네는 시편들은 순수하게 묻는다. 당신의 물레는 지금 무엇을 잣고 있는가. 이 투명한 기록은 소멸조차 생의 한 조각으로 품어 안는 구순 시인의 거대한 긍정이다.
저자

김학명

미수(米壽)를지난시인.
갈내(現용인시기흥구)에서나고자랐다.
아차산인근에서40년꽃가게를했고,8년전넘겨주었다.
가벼운술한잔으로시작한하루를아내와함께보내며,어쩌다시를쓴다.
과거,이야기시〈달맞이꽃〉〈낭뎅이에도깨비〉두권의시집을냈다.

목차

시인의말/술잔/택호/가을들에서/참나무의상처/닭울음/하얀발자국/골말골짜기/아차산소묘/세상일/추억의한가닥/그때그랬어야했다/찔레꽃연정/뇌성벽력/세월/낙엽이된다/우리는춥다/눈/비목/소풍날/옹헤야,/이어도사나/병정놀이/가랑잎요정/폭풍에언덕/돌아라물레야/애기똥풀/꿈마루/꽃보다아름다워/겨울나무/이태원의변고/발길/겨울비소묘/회상/돌뿌리/마지막잎새/나의살던고향은/탱자나무울타리가있는마을/그밭이야기/자연인을말하다/개구리의망행가/좁쌀개미집/밤길/물방구리/장작개비/삶/푸념/가능소리/어둠속에그리는그림/공원의늪지/동막골을말하다/저승으로가는길/오늘날에선녀와나무꾼/독백/소망/편집후기

출판사 서평

시인의책을엮은몇달,나는호사를누렸다.어쩌면내평생누리지못했을수도있을,내가기억하지못하는어떤조부의존재를감히상상해볼수있는시간이었으므로이경험은과히호사라고말해도될것이다.그리고나는그와의첫조우를떠올린다.

아직봄이오기전이었다.찬찬히열리는유리문을나는곁눈질로살폈다.아,무슨일이실까.안녕하세요,라는인사대신여기는어쩐일이신지를나는먼저물었다.책을사러오신손님이아니라는느낌,무언갈묻고자잠시들어온행인으로인식했기때문이었다.실례합니다,여기는뭐하는곳인가요?여긴서점입니다.불현듯그들은여기서책을엮어줄수있는지물었고얼떨결에나는그렇다고답했다.곧장그는품에서자필로쓴시수십장을꺼내들었다.부탁합니다,나는이사건이이책을엮게된가장우연적인계기가될줄은그땐결코상상하지못했다.

그가내앞에앉았다.나는그에관한그어떤것도가늠하지못했다.미수(米壽)의나이,그리고나의나이,그리고어떤세월의차이만을가늠했다.나는처음대면한그에게아무것도묻지못했다.고작물었던것은마치이력서를확인하는어떤면접관처럼,평소무엇을하면서지냈으며,그전에는어떤삶을살아왔는지에관한피상적인물음뿐이었다.물음에대한답대신,그는자신이시를쓰는이유,글을쓰는이유에대해말했다.

시상이떠오르면그는잠을잘이루지못한다고말했다.그의말에곧장시란무엇인가,시는무엇을말하고자하는가에대한배경이수없이스쳤으나,그의말대로시를쓰는사람의마음이란그의말그대로,그것을꼭써야만한다는영혼의부름으로발현된것이리라,이내이내부끄러웠다.언제나나는여느시인의말을해독하려고애쓰는독자일뿐이었으므로,참뜻을알지못해머리채를부여잡던과거의모습이순간기억에스치기도헀다.돌연시인은말했다,나는이사람없이는살지를못해.

요즘우리애써걷는다
우리가할수있는건
먼저간벗들대신
내할멈과둘이
이렇게걷는것이다

〈하얀발자국〉부분,18p

그는언제나아내와함께였다.그녀는마스크를끼고있었고,시인의말로는그녀가귀가어둡다고말했다.그리고자신의다리가성치못하다고말했다.서로에게꼭필요한존재로,단한사람을남기는일처럼한인간이꿈꿀수있는궁극의지향을그는이루어내고있었다.그는평생크게가진것없이살았다고말했지만,내눈에는모든것을가진사람처럼보였다.

그들의어떤귀갓길,‘애써걷는’시인과아내의뒷모습을사진에담았지만사진한장에담는다고어찌그들의인생을담을수있으랴.저장면은미래의나나당신이되고싶은어떤모습,멀다못해분리되어있는느낌일뿐일그모습에도나는코가시큰했다.가장안전한길을골라걸어야했을노인의길,건강때문에라도‘애써’걸어야했을이길,그들이살아온어떤길을상상했다.여느젊은이에게매우짧은이길에행여눈이나비가올지문득걱정했던몇달이었다.

이시인으로부터나는무엇을느꼈을까.그것은인간의물리적생존양식,생로병사가아니었다.그의표정에서감지되는생의희로애락,젊음과나이듦을초월한어떤기쁨과슬픔이었다.비록극히짧은시간동안그의생애를살펴보기란불가능할것이다.그가세상에시로써적어온모든텍스트를우연히,전부살펴보더라도말이다.그나마라도간신히그의생애를가늠해볼수있었던매개는,그의외연적인모습인말씨와글씨,그리고표정뿐이었다.그리고그것만으로충분했다,이시집을엮는일에는차고넘쳤다.시인의책을엮는사람에게다른것은필요하지않았다.그저그가팔을뻗은소주병과내잔에차오르는술처럼과분했다.

이윽고미수를지나아흔이된시인에게어떤슬픔을찾는일이란어쩌면무의미한일일테다.그는비로소하고싶은말을하고,쓰고싶은말을거침없이쓸수있는것을생의가장큰기쁨으로몸소깨달은것처럼보였다.지나온과거에슬픔은분명떨어져있었지만그는그것을손에쥐고자뒤돌아걷지않고,그저고개만돌릴뿐,후회하지않는다.이것이초연함인가,스스로깨닫지않고서는결코배울수없는미지의그것,생의어떤일면을결코알수없을것같다는막연함과동시에찬란과경이를느꼈다.빛난다,생을논하는것보다,아직도말하고쓸수있을것같다는그표정과눈을나는조용히관찰한다.

짧다면짧은이편집기간,나는오가며더많은장면을포착할수있었다.누려왔던젊음의권력을상기한다.그리고뾰족한한부분을깎아낸다.젊음을한참이나지나온한인간이그리는꿈,그리고우리에게남기고온여름,그뜨거움으로여전히따듯한것을남기는그들의눈과입,누군가에게빼앗긴내면의권력에가슴을치는일보다는그저내어주는일을기쁨으로여길뿐일그들의포근함과따듯함을,세상이깨닫게될기회가더욱많아지기를.

생전입에대지않았던추어탕과미꾸라지튀김을나는잊지못할것이다.그가스스럼없이내준술의힘을빌려나는이책의후기를쓴다.그들은아직도내게무엇을어떤대가없이내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