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에 반대한다

진보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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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역사가 단선적으로, 결정론적으로 나아간다고 믿는 진보 담론은 역사 속 우발성과 잠재적 가능성들을 무시하여, 그 과정에서 폭력에 희생되는 “으깨진 새”들을 은폐한다. 이들을 외면한 채, 체제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보다 그 안에서 탈정치화, “관용” 등을 도모한 결과는 포퓰리스트 권력자가 스스로를 외설적 광대와 악당과 같이 만듦으로써 오히려 정치적 지배를 강화하는 “최악 만들기”와 파국에 대한 “도착적 부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전진하다 보면 결국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뫼비우스의 띠 위에 서 있다. 안온하다고 믿어온 '관리된 세계'라는 정상성이 실은 전쟁과 포퓰리즘, 생태적 재앙으로 말미암은 파멸이라는 필연적 '고정점'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이 막다른 길을 벗어나기 위해, 슬라보예 지젝은 역사를 단선적 진보가 아닌 실현되지 못한 우발적 가능성들이 중첩된 '홀로그램'으로 사유할 것을 제안한다.
파국을 필연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숙명론적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재앙이 이미 발생한 미래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그 운명을 소급하여 바꾸기 위해 불가능해 보이는 행동을 감행하는 용기이다. 기만적인 낙관주의를 거부하고 "희망이 없더라도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행동"할 때, 역설적으로 진정한 희망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슬라보예 지젝

헤겔 변증법, 라캉 정신분석, 마르크스주의 비판이론을 결합해 독자적인 사유 체계를 구축해온 슬로베니아 출신 철학자이다.
슬로베니아 류블라냐 대학교 철학과의 선임 연구원이며, 스위스 유럽 대학원(European Graduate School, EGS)에서 철학 및 정신분석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미국 뉴욕 대학교의 독일학 분야 국제 석좌교수 직함을 보유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 『레닌의 유산: 진리로 나아갈 권리』 등이 있다.

목차

- 한국어판에 부쳐
- 진보와 그 변이들
- 진보에 반대한다
- 가속
- 홀로그램식 역사
- 절대 불변자
- 최악 만들기
- 구체적 상황의 구체적 분석
- 내전
- 권위
- 악화일로
- 우리는 바이오매스다
- 세계의 종말
- 부인
- 역자 해설 | 진보로 거듭 되돌아가는 길
- 주석

출판사 서평

기후 위기를 경고하는 환경운동가가 '진보'를 말한다. 실리콘밸리의 기술 유토피아주의자도 '진보'를 말한다. 탈성장을 외치는 활동가도, '위대한 미국'을 약속하는 포퓰리스트도 저마다의 '진보'를 말한다.
모두가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는데, 왜 세계는 후퇴하고 있는가?
슬라보예 지젝은 이 역설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간다. 『진보에 반대한다』는 '진보'라는 단어를 심문대에 올려놓는다. 누가 이 단어를 점령했는가. 그들이 말하는 '더 나은 미래'에서 무엇이 배제되고, 무엇이 희생되는가. 13편의 에세이를 통해 지젝은 우리 시대 가장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도둑맞은 미래]
'진보'라는 단어는 도둑맞았다.
지젝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자와 트럼프식 포퓰리스트, 자기 계발 산업과 가속주의자들은 '진보'라는 개념을 인질로 삼았다. 이들은 저마다 다른 방향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앞으로 가는 길"이라고 외친다. 문제는 이 상충하는 비전들이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다는 것이다. 모두 현재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질문하지 않는다.
지젝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불교 경제학까지, 탈식민주의 운동에서 상대성 이론까지, 젠트리피케이션에서 푸틴과 마린 르펜까지, 또 메리 포핀스에서 라캉과 레닌까지 종횡무진하며 온갖 인물과 개념을 호출한다. 지젝 특유의 방식-예상치 못한 곳에서 통찰을 끌어내는 -은 여전하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은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진보' 담론들이 작동할 때 무엇이 배제되고 희생되는지, 그 이면의 욕망과 부인과 부정의 역학을 추적하는 것이다.

[지젝, 구체적 현실 앞에 서다]
헤겔, 라캉, 마르크스를 넘나드는 글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진보에 반대한다』는 에세이 형식 덕분에 한 편씩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고, ‘웹 소설’과 여러 영화 등의 풍부한 대중문화 사례가 철학적 개념의 길잡이가 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추상적 사변에 머물지 않는다. 지젝은 "분명한 대안이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용기"라고 쓴다. 염세주의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 희망에 기대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라는 주문이다. 지젝의 철학은 독자에게 편안한 위로를 주는 대신 불편한 질문 앞에 직접 서게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진짜 사유가 시작된다.

[파국을 직시할 때 희망은 피어난다]
세계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진보가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지젝은 이 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제안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하는 법을 바꾸라고 말한다.
목적론 없이 계획하고, 종말론 없이 행동하라. 거짓 희망을 버릴 때 비로소 현실을 직시할 수 있고, 현실을 직시할 때 비로소 변화의 조건이 열린다. 『진보에 반대한다』는 절망에서 출발하되 절망에 머물지 않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가장 희망적인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