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 나를 보았다 (정선희 시집)

초록이 나를 보았다 (정선희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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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우울과 슬픔을 건너, 마침내 다정한 세계에 닿는 시


“사람의 눈빛을 / 약으로 쓸 때가 있었다.”
정선희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초록이 나를 보았다』는 이 짧은 고백에서 시작한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의 눈빛으로 치유하고, 우울과 슬픔마저 삶을 견디게 하는 힘으로 바꾸어온 시인의 시간이 이 한 문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빛과 물, 나무와 꽃, 바위와 새를 오래 바라본다. 그러나 그가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은 일방적이지 않다. 표제작 「초록이 나를 보았다」에서 물오리의 눈동자에 찰나처럼 떠오른 초록은 시인이 발견한 색인 동시에 시인을 바라본 세계의 눈빛이다. 보는 사람과 보이는 대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초록은 단순한 색채를 넘어 사라진 것과 남겨진 것, 믿음과 의심, 삶과 죽음을 잇는 통로가 된다.

정선희의 시는 먼 시간과 넓은 공간을 자유롭게 오간다. 20억 년 전 바위의 기억을 더듬고, 중생대의 공룡과 태초의 빛을 불러내며, 몽골 사막의 별과 보이저 1호의 시선으로 오늘의 삶을 돌아본다. 이러한 우주적 상상력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도피가 아니다. 가까이에서는 풀리지 않는 인간의 고민을 더 먼 자리에서 바라보고, 우리의 근심과 상처를 새로운 크기로 재어보려는 시적 사유의 방식이다.

그렇다고 이 시집이 거대한 시간과 관념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수돗물을 틀어놓고 울던 사람,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방 속에 품고 살아온 사람, 남의 말에 쉽게 미안해하며 정작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못했던 사람의 마음을 세심하게 들여다본다. 「오랜 우울에게」에서는 자신의 우울한 이력이 누군가에게 내밀 손이 될 수 있는지를 묻고, 「울음 동호회」에서는 하루치 울음을 비워낸 사람이 가벼워진 달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가게 한다. 슬픔을 없애려 하기보다 충분히 울 수 있는 자리부터 마련해주는 것이 정선희 시가 지닌 다정함이다.

시인은 익숙한 가치의 방향을 유쾌하게 뒤집기도 한다. 「결핍이라는 자원」에서는 부족함이 사라진 시대에 스스로 불편한 자유를 선택하고, 「영리한 우울」에서는 우울을 삶의 비바람을 피하는 방패로 받아들인다. 「나는 내 편이 아니었다」에서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강박과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려온 삶을 돌아보며, 이제라도 스스로의 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반전은 삶의 그늘을 오래 통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통찰이다.

시집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 시선은 타인과 세계를 향해 더욱 따뜻하게 열린다. 「다정한 것들이 살아남는다」에서 시인은 한때 선망했던 냉소와 결별하고, 다정함이야말로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지닌 힘임을 깨닫는다. 「손의 세계」에서는 맞잡은 손 하나에서 한 사람의 마음과 기억, 상처와 운명까지 읽어낸다. 손을 잡는 일은 곧 한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이며, 사막에서 서로에게 오아시스가 되어주는 일이다.

『초록이 나를 보았다』는 우울을 밀어내지 않고, 슬픔을 삶의 바깥으로 추방하지 않는다. 깨진 자리에 금빛을 입히는 킨츠기처럼 상처를 감추지 않은 채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되살린다. 상처 입은 것들이 서로의 손을 잡을 때, 결핍과 우울도 살아갈 힘이 될 수 있다고. 냉소보다 다정함이 오래 남고,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눈빛이라고 말한다.
-출판사 서평
저자

정선희

·경남진주출생
·2012년《문학과의식》신인상,2013년강원일보신춘문예등단
·국어교육전공
·제20회모던포엠문학상수상
·시집『푸른빛이걸어왔다』,『아직자라지않은아이가많았다』,『엄마난잘울어그래서잘웃어』,『초록이나를보았다』등출간

목차

목차




시인의말
1부오랜우울에게
차가운손·12
오랜우울에게·14
큐레이터·16
걷는기분·19
우주적솔루션·21
킨츠기봄·23
슈빌·25
슬픔의눈금·27
결핍이라는자원·29
영리한우울·31
휴가두배로즐기기·33
심심함을찾아서·36
바위연습·37
슬픔은어디로가야하나·39
돌을기르는사람·41





2부눈물이앞을가릴때
초록이나를보았다·44
부치지못한편지·46
책의귀·48
감정의포기·50
용기·52
맨드라미의설문법·54
뭉뚱그리는말·57
옴·59
짹짹커피·61
울음동호회·63
무채색으로무채색을말하는·65
철쭉으로만든관·68
길들여진다는것·69


3부버리고비우면서떠나는
내기하듯목련나무·72
초록과맞장뜨다·74
거룩한이사·75
표정의광고판·77
만대재고양이·80
집들이선물·82
자귀,자기·84
벤치의자세·86
운명의수레바퀴·89
책기둥·91
불면증·93
남해설천의봄·95
나는내편이아니었다·97






4부사랑을많이받았다는말
밤의소리·100
다정한것들이살아남는다·102
노후준비·105
슬픔이시킨일·106
입이없는인형·108
손의세계·110
꼭두각시·112
그게뭐라고·113
입만남은악어·115
웃음포인트·117
자살도힘이있어야·119
신선놀음·121
놀아주다·123
송창식·125
익룡발자국박물관·126
생활의달인·128
벚꽃엔딩·129
|해설|김재홍_장구한‘시간’과광대한‘공간’과‘사유’의현대성·130

출판사 서평





정선희시인시집『초록이나를보았다』해설원고





장구한‘시간’과광대한‘공간’과‘사유’의현대성
-정선희시집『초록이나를보았다』에대하여














[해설]

장구한‘시간’과광대한‘공간’과‘사유’의현대성
-정선희시집『초록이나를보았다』에대하여


김재홍시인•문학평론가


흔히서정시의시간을영원이라고말합니다.시는인간의손을빌어태어나는것인데,그것이담고있는시간을영원이라고하는것은형용모순이거나논리적착오로받아들여질수있습니다.하지만순간을살아가는유한자인인간은영원히‘영원’을희망할수밖에없습니다.너무나인간적인욕망입니다.인간은시간앞에서한없이열등한존재이지만,그렇기때문에시인은그것에도전하는최전선에선자라고하겠습니다.
시인들은멀리과거와대화하고,더멀리미래와도이야기를나눕니다.그러므로시인이마주하는대상은일찍이세상을떠난사람이거나아직오지않은사람입니다.시인들은우선존재론적으로같은고뇌를겪으며살다가는사람에주목하는것입니다.그뿐아닙니다.생물학적으로차원을달리하는나무와풀과꽃과소통하는가하면,물리적으로구별되는하늘과바람과구름과바위와도무람없이지냅니다.시간앞에서그들도한없이초라한존재들이니까요.
한가지유념해야할것은,시인들과소통하는존재들이사람이든사물이든그어떤것이라도결국시는사람을지향할수밖에없다는점입니다.그것이시의숙명입니다.시는오직사람편에선말과같습니다(“말아,사람편인말아”,정지용,「말‧1」).하나도사람,둘도사람,셋도사람입니다.시는시인의손을빌어태어나사람만을지향하는양식입니다.때문에시적대상에대한매우집요하고특별한관심이엿보이는정선희의네번째시집『초록이나를보았다』도결국사람편에서있습니다.

바위와공룡과슈빌

정선희는20억년전지질시대의바위를탐색하는가하면,1억6천만년전중생대백악기의공룡과대화를나눕니다.그것만이아닙니다.맨드라미와목련과자귀와벚꽃과소통하며우울과슬픔까지사유합니다.그의시적관심은수직적시간에다수평적공간을통섭하는모자이크와같다할수있습니다.장구한시간과광대한공간을적극적으로자신의시에호출하는정선희의의욕은어디를향하겠습니까.
물론사람입니다.“시간건너의이야기가/열두폭병풍처럼펼쳐진다”면서“저조각들을이어붙이면/어떤새로운서사의주인공이탄생할까”(「큐레이터」)라고자문하는그는아파트단지안의조경을통해태초의빛부터20억년전의바위를큐레이션합니다.그귀결이놀랍습니다.그것은“우주가팽창하고있다는증거”의발견입니다.

아파트조경은산수화전시장화폭같다

바위에물을주자그림이쑥쑥자란다

정해진풍경인데빛이나습도에따라
시시각각다른농담을갖는그림들
비가오면더선명하게번진다

빛은제안에물의길을가지고있어
출렁이는물결로도록을넘기는것같아

시간건너의이야기가
열두폭병풍처럼펼쳐진다
저조각들을이어붙이면
어떤새로운서사의주인공이탄생할까

아파트를지날때마다
나는큐레이터가된다

태초에빛이있었고
빛이물을사랑하는것으로
이야기는굴절되기시작했답니다

꽃이피고나무가자라는건
우주가팽창하고있다는증거

세상은너무진부해
좀더재미난이야기가없을까?

20억년전바위가들려주는이야기
물이내몸을가로지른경로가확실하지않아서

즐거이길을잃는다
물소리로흐르며가야할곳을바위에게물었다
-「큐레이터」전문

어떻습니까.“사람은사람이전에이땅에나타난모든존재들의바람과애씀의열매”(양명수,「우주생명의길,사람됨의길」,테야르드샤르뎅,『인간현상』)라는도저한사유가보이지않으십니까.조경은이미“정해진풍경인데빛이나습도에따라/시시각각다른농담을갖는그림들”이며,그것은저멀리‘태초의빛’에서시작되어20억년전바위와팽창하는우주와함께우리곁에온것입니다.그안에는수많은서사들이스며들어있어말로다할수없는천변만화의산수화가펼쳐진것입니다.여백속에더많은이야기를품고있는산수화자체입니다.
오늘의‘사람’을있게한장구한시간은우주의팽창과더불어미래로나아갑니다.우리는우리다음에오는사람들과모든존재들을바라기에오늘도애를쓰며살아갑니다.시인이“좀더재미난이야기가없을까?”라고한다거나“즐거이길을잃는다”라는시구를표의그대로해석하면안되겠습니다.‘더재미난’이야기는세계의다양성과다질성을함축합니다.세계는펼쳐져더욱많은이야기를만들어내야하는것입니다.그것이진정한진보인것이죠.그러므로‘길을잃’는것도얼마든지행복한일이될수있습니다.넓고넓은우주의작디작은틈새를살다가는우리는적극적으로길을잃어야하는것입니다.정선희의큐레이션은이처럼장구하고광대합니다.

노후를걱정하는너는
몽골사막의별들을생각하는나를되묻는다

먼과거로부터오고있는별빛들이
언제도착할지를몰라
일몰이잰걸음으로마중을나가고있다

너는현실도피라고하지만
더근원적인문제를해결하기위해
밤하늘이시작되던태초를올려다보는것이다

머리가아프면생각을
발가락에옮겨밖으로나가걷는것처럼

지금여기서해결할수없는문제는
우주적관점에서볼필요가있다

전쟁과기아,환경문제
우주적관점으로멀리서보면
사이사이별이떠빛나고있을텐데

초식공룡처럼몸을부풀린고민들이
어떻게멸종하는지도알게될텐데

보이저1호는오래전돌아본지구에서
어떻게서로를태워권태로워지는지를
나와나를공전하는한사내로부터깨달았을지도

우주가너와나에게서비롯된다는것을
-「우주적솔루션」전문

그러나우리는세속을살며일상속에서하루하루고민하며살아갑니다.우리의원인이저먼빛에있는것을알면서도,우리의결과가다가올저먼미래의어느돌조각같은것임을알면서도우리는날마다삶의편린을고역으로인식하며삽니다.그러니정선희의솔루션에주목할필요가있습니다.그는“몽골사막의별들”에게서해법을찾고,“보이저1호가오래전돌아본지구”에서탈출구를봅니다.시인의말처럼그것은“현실도피”가아닙니다.“더근원적인문제를해결하기위해/밤하늘이시작되던태초를올려다보는”것입니다.
아주아름다운표현이이작품의시적기운을드높이고있습니다.서녘하늘로저무는일몰은왜붉은것인가요.바로“먼과거로부터오고있는별빛들이/언제도착할지를몰라”애태우기때문입니다.우리가왜우리삶의터전을산보하는것인가요.바로“머리가아프면생각을/발가락에옮겨”야하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시난고난한생을힘겹게살아가는우리는모두정선희의「우주적솔루션」을깊이음미해야겠습니다.그리하여고대의흔적을고스란히간직한슈빌처럼우리도“말뚝처럼묵묵히버텨낼”수있을것입니다.

구두코를닮아슈빌이라불리는새
너무큰날개와중력을거스르는몸집
지상에서가장큰부리의슬픔이무겁다

고대에서날아든새
오만한듯소심한듯
말뚝처럼묵묵히버텨낼것이다
-「슈빌」부분

초록도,슬픔도,우울도

“태양과나와물오리사이에서만들어진//찰나의색을분명히보았다”는이번시집의표제작「초록이나를보았다」를봅니다.보다시피정선희는여기서‘순간’을봅니다.장구한시간과광대한공간을볼줄아는사람은찰나도볼수있는것입니다.

태양과나와물오리사이에서만들어진

찰나의색,분명히보았다

물오리한마리고개돌릴때
눈동자가초록으로빛나는것을

쏟아지는빛사이로눈맞추려고했지만
기억의셔터를눌러봤지만

찰나와사이에서찍힌건
새들이벗어둔그림자를챙기는물보라뿐,

너는초록눈동자를믿지않는다
보이는것만담는피안의세계

스치며사라지는
초록의일들을어떻게설명하면좋을까

저높은곳으로안내하는한줄기빛.

강가를지날때마다눈동자를두리번거린다
돌멩이를던져도달아나지않는새들

살다보면모든것이무의미해질때가있다
그마주쳤던순간조차의심될때를
초록이라부를까

직접적인게아니면믿지않던
그사람을떠나보냈다
-「초록이나를보았다」전문

어떤순간입니까.‘물오리’의눈동자가“초록으로빛나는순간”입니다.“태양과나와물오리사이에서”분명히본것입니다.주체는분명‘나’입니다.서정시의주체는언제나1인칭입니다.그런데제목은‘나’가아니라‘초록’이보았다고합니다.왜일까요.주체의역전을가로질러시인이도달하려는모종의의욕이있습니다.
‘본다’는것은상대적인것입니다.보는주체와보이는주체는,동시에보이는주체와보는주체가됩니다.그것은사람사이에서도사람과동물(사물)사이에서도마찬가지입니다.이를상호주체성이라고할수도있고,비동시적동시성이라고도할수있겠습니다.요컨대탈주체화입니다.주체‧객체의이원론을거부하는현대철학의일의적사유가들어있습니다.
우리는기억합니다.‘나’와‘너’를나누고,‘우리’와‘그들’을구별해서얼마나많은사람들이목숨을잃었었으며,얼마나큰전쟁이우리를할퀴고갔는가를말입니다.정신과육체,안과밖,아(我)와비아,옳음과그름으로나누어20세기는가히살육의시대였습니다.무시무시한폭력으로부터벗어나는데있어가장효과적인수단은바로‘내가본초록이나를보는순간’이라는인식인것입니다.
그러므로“스치며사라지는”초록의순간들은어쩌면“저높은곳으로안내하는한줄기빛”처럼우리모두가이르고자하는곳을향하는유일한방법인지모르겠습니다.때문에“살다보면모든것이무의미해질때가있다”는통찰은일의성의관점에서보면당연한것입니다.우리가날마다지지고볶고싸우는모든일들은‘초록’의관점에서는사실아무것도아닌것입니다.“직접적인게아니면믿지않던”그사람이떠난것도당연한것입니다.시인의눈에는이미그러한사람이있어서도안되고,있지도않은것입니다.

낮에자주다니는길인데
밤이면미로가되는고갯마루

한번도그곳에닿지못했다
달밤에그곳을올라
슬픔의눈금재어본다

오늘은다섯발자국내일은열발자국

어둠을삼킨짐승의위장처럼
축축하고미끈거린다여섯발자국갔다가
일곱걸음내려오게되는길

남은천덧댄밤하늘같아끝이보이지않는다
오래쳐다보면안팎이뒤집어진다

계단에이르러쏟아지기시작한눈물
흩날리는눈
나는얼어붙는다

슬픔을퉁치자고덤벼드는두려움
나는그만항복하고싶다

저고갯마루만넘으면되는데
가시덤불이돌멩이가딴지를건다

후렴구만계속지시하는도돌이표처럼,

눈물이앞을가릴때보이는미리내

저곳에이르지못했다
내슬픔은여전히덧댈천조각으로넘쳐난다
-「슬픔의눈금」전문

슬픔도마찬가지입니다.멀쩡히자주다니던길이어느순간미로가되기도하듯,슬픔은우리가통제할수있는대상이아닙니다.그것은인간의내면에서벌어지는어떤심리-정서적반응지이지만,그게의지적작용이아니라는데유한자로서우리의명백한한계가있습니다.「슬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