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옮긴이의 말
『영감이 흐르는 언덕』은 바레스가 50대에 출간한 소설이다. 『회고록』에서 그는 “40년간 품어온 이야기를 7년 동안 썼다. 신비와 사유로 가득한 이야기들이 내 유년을 뒤흔들었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의 문학의 정점이라는 평을 받아왔다. 폴 클로델은 “프랑스적 영혼의 대서사”라고 극찬하며 바레스가 이성을 초월한 열정과 집단적 영성을 통해, 프랑스라는 감성의 실체를 드러냈다고 했다.
또한 앙드레 지드는 “역설적 매혹이 흐르는 소설이다. 나는 그의 정견政見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영감이 흐르는 언덕』은 깊은 인간적 진실을 담고 있다.”라고 했다. 바레스의 민족주의를 비판해 온 그도 이 소설을 ‘초월성과 미학이 일치한 보기 드문 작품’으로 평했다. 그런가 하면, 알베르 티보데는 이 작품을 ‘정신적 풍경화’, ‘풍경과 정신이 결합된 새로운 형식의 역사소설’로 정의했으며, 프랑수아 모리악은 작품에 묘사된 광신, 신비주의, 집단적 열광을 단순한 종교적 비판이 아닌 ‘인간 본성과 신성 사이의 균열’을 탐색하는 정교한 문학적 장치로 보았다. 그만큼 『영감이 흐르는 언덕』은 찬사를 받아온 작품임에 틀림없다.
지난 여름 우리(두 번역자)는 한 달간 프랑스 여행을 다녀왔다. 도시보다는 시골 마을에 자유로이 머물렀다. 마침 우리는 모리스 바레스의 소설 『영감이 흐르는 언덕』을 함께 번역하는 중이었다. 당연히 바레스의 고향 낭시의 시옹 언덕을 찾아 여러 날 머물렀다. 언덕은 넓게 펼쳐진 평원, 그리고 아름다운 작은 마을 시옹과 삭송을 보여주었다. 이어서 경건하고 웅장한 성당으로 안내했다. 우리는 작가의 영험한 상상력의 원천을 눈으로 확인하며 환희를 느꼈다. 거기서 만난 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바레스가 백 년을 넘어 여전히 뜨거운 논쟁의 대상인 것도 확인했다.
“천재 작가죠. 폐허가 된 고향 땅에 활력과 영성을 불어넣은 사람입니다. 물론 그의 민족주의 사고思考가 따가운 비판의 대상이기도 했지요.”
그들의 말끝은 작품을 번역하는 동안 많은 질문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레오폴 바이야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불행한 그이는 하느님이 비밀로 간직하신 것들에 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임종 직전의 오브리 신부의 말 역시 바레스가 주목한 인물이 누구인지 연신 묻도록 한다. 무너진 종교의 폐허 위에 선 바이야르? ‘기록으로서의 성서聖書’를 넘어 대자연과 성령의 합일을 꿈꾼 뱅트라? 소설가 귀 뒤프레Guy Dupre´의 말에 따르면, 바레스가 신비주의와 신권, 토속적 신앙과 기독교의 모순적인 힘을 조율한 곳이 바로 언덕이었다.
“나는 이 땅 그리고 머나먼 조상들의 영이고, 자유이며 영감이니 ….”
초원 언덕의 말을 대변하는 바레스의 말은 여행하는 동안 사유와 몽상을 가득 채워 주었다.
우리는 성스러운 마을들을 순례자처럼 돌아다녔다. 루르드, 고르드, 푸르비에르 언덕이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일요일은 마을 성당의 미사에 참여했다. 시적 풍광을 지닌 매력적인 마을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시옹의 언덕 아랫마을 삭송의 커다란 곡식 창고 이름 La Grange inspire´e 영감이 흐르는 곳간! 바레스의 소설 『영감이 흐르는 언덕』 이름에서 따온 간판이 눈에 띄었다.
“문학이 마을을 꽃 피우는구나 ….”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사는 마을을 내내 생각했다.
바레스의 소설 제목을 활용한 예는 또 있다. 벨기에 출신 작가이며 정치가인 피에르 노톰은, 신앙의 유적지 루브루아의 몽켄탱을 ‘영감이 흐르는 언덕’이라 명명했으며, 드골 대통령은 1944년, 전쟁 직후 소르본 대학교 연설에서 “영이 숨 쉬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예로부터 소망해 온, 그리고 지금도 갈망하는 바를 증언하는 장소들입니다. 그 빛나는 곳 가운데 소르본은 으뜸의 자리입니다.”라는 말로써, ‘폐허의 프랑스는 무너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강인한 영(에스프리)을 지니고 있음을’ 웅변했다.
『영감이 흐르는 언덕』은 일종의 주문呪文의 힘이 흐르는 시적 소설이다. 바레스는 민족의 에너지를 일깨우고, 땅이 지닌 신성성을 부추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주단’을 교회뿐만 아니라 교회 밖 대지에도 활활 펼쳐놓은 작가이다. 그의 문학은 종종 ‘하늘에 매혹되면서도 대지에 뿌리내린 존재들’을 보여준다. 그의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 시옹 언덕의 풍광을 통해 보여주는 영적 아우라를 조금도 흐리지 않는다.
언덕은 우리의 삶과 신앙을 상징한다. 그것은 한 영혼이 하느님에게 도달하는 통로이리라. 우리 두 번역자는 시옹의 언덕에 우뚝 선 바레스 기념비의 글귀를 큰 소리로 외며 내려오던 뜨거운 날을 기억한다. 바레스는 말했다.
“여기, 들판을 두르는 지평선, 그것은 온 삶을 감싸는 것이니, 끝없는 우리의 갈망에 영광의 자리를 내어주노니, 동시에 우리의 한계를 일깨우노니.”
그는 또 말했다.
“나는 한 지역을 언제나 그 고유한 신성으로 일깨우고, 다시 인간의 숨결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항상 자연에 대항하는 인간의 투쟁이다. 나는 때로는 자연을 예찬하고, 때로는 자연을 사로잡으며, 거기에 내 영靈을 담기 원한다.”
프랑스에서는 20세기 내내 사르트르나 푸코 같은 파리Paris의 지식인들이 문화적 주류였다. 바레스 같은 이들은 그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지역 작가라는 별명이 붙었다. 바레스 역시 한때 종교 소설가나 국수주의 작가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글로벌’보다 ‘로컬’, 지구촌보다 내 나라에 천착한 작가에 우리는 주목했다. 그리고 『영감이 흐르는 언덕』을 번역하면서, ‘지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말을 다시 생각하며, 한 작은 마을의 서사에 오랜 세월 천착해 온 바레스에게 꽤 오래 ‘꽂혀’ 살았다.
모름지기 『영감이 흐르는 언덕』은 우리의 영혼을 무력無力에서 활력活力, 활활력活活力으로 이끄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프랑스 국민이 알자스와 로렌느를 프러시아에 빼앗기고 보주산맥의 능선을 바라보던 시절, 대박이 난 작품이다. 한때, ‘반세기 최고의 소설 그랑프리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영감靈感은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순리와 자연에 맞서는 것이다. 때로는 불편함과 고통과 시기와 질투를 감수하는 것이다. 영감은 영광과 활력과 상승을 예고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옹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한 세월 폐허인 상태였다. 십자군의 영광도, 프랑크 공국의 최고 통치자의 존엄도 묻혀있었다. 마을 사람들도 폐허에 익숙해 있었다. 그 때, 레오폴 바이야르는 시옹의 언덕에서 지역의 옛 위인들이 이루었던 번영, 그리고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로스메르타 여신을 섬겼던 마을 부흥의 복원을 꿈꾸었다. 제도적 권위에 맞서고, 재정난에 허덕이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바이야르 형제들은 언덕에서 신앙적 영감을 얻게 된다. 시옹의 로스메르타와 성모마리아를 동시에 섬겨온 조상들의 힘을 재발견한 것이다. 그 에너지로 40여 년, 스스로 선택한 고통의 삶을 지켜냈다.
『영감이 흐르는 언덕』은 표면적으로는 종교적 논쟁이 화두이지만, 실은 독특한 영성을 지닌 뱅트라와 틸리 언덕으로부터 받은 영감으로 오래 전부터 ‘우리의 언덕’에 존재해 온 영성을 복원해가는 바이야르 형제들의 이야기이다.
시옹의 언덕은 ‘거스름’을 부추기는 곳이다. 언덕의 정상에 서면 거칠 것이 없어보인다. 멀리는 광활한 보주산맥이 보이고, 가까이는 긴 밭고랑처럼 굽이치는 평야가 내려다 보인다. 여기서는 누구라도 활력을 느낄 수 있다.
영감을 얻으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레오폴 바이야르 형제 사제들의 삶이 시옹의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의미가 있었을까?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주는가? 시옹의 언덕은 오늘도 몽상과 사유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끝없는 영감을 제공하는 곳임에 틀림 없다.
두 번역자는 쉼 없이 토론하며 작업했다. 그리고 하느님, 영(에스프리), 대지, 이 세 개념을 상징하는 단어 ‘언덕’을 내내 생각했다. 아메리카 흰 얼굴의 사람들이 전해주기 훨씬 이전, 우리 선조들의 가슴에, 우리의 대지에 이미 존재해 온 하느님, 영!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장지오노Jean Giono와 동시대에 빛나는 공간의 시학을 일군 모리스 바레스가 선물한 몽상의 힘으로 오늘도 우리는 사유의 언덕을 올올히 오른다.
2026년 5월 박용주 · 홍순도
『영감이 흐르는 언덕』은 바레스가 50대에 출간한 소설이다. 『회고록』에서 그는 “40년간 품어온 이야기를 7년 동안 썼다. 신비와 사유로 가득한 이야기들이 내 유년을 뒤흔들었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의 문학의 정점이라는 평을 받아왔다. 폴 클로델은 “프랑스적 영혼의 대서사”라고 극찬하며 바레스가 이성을 초월한 열정과 집단적 영성을 통해, 프랑스라는 감성의 실체를 드러냈다고 했다.
또한 앙드레 지드는 “역설적 매혹이 흐르는 소설이다. 나는 그의 정견政見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영감이 흐르는 언덕』은 깊은 인간적 진실을 담고 있다.”라고 했다. 바레스의 민족주의를 비판해 온 그도 이 소설을 ‘초월성과 미학이 일치한 보기 드문 작품’으로 평했다. 그런가 하면, 알베르 티보데는 이 작품을 ‘정신적 풍경화’, ‘풍경과 정신이 결합된 새로운 형식의 역사소설’로 정의했으며, 프랑수아 모리악은 작품에 묘사된 광신, 신비주의, 집단적 열광을 단순한 종교적 비판이 아닌 ‘인간 본성과 신성 사이의 균열’을 탐색하는 정교한 문학적 장치로 보았다. 그만큼 『영감이 흐르는 언덕』은 찬사를 받아온 작품임에 틀림없다.
지난 여름 우리(두 번역자)는 한 달간 프랑스 여행을 다녀왔다. 도시보다는 시골 마을에 자유로이 머물렀다. 마침 우리는 모리스 바레스의 소설 『영감이 흐르는 언덕』을 함께 번역하는 중이었다. 당연히 바레스의 고향 낭시의 시옹 언덕을 찾아 여러 날 머물렀다. 언덕은 넓게 펼쳐진 평원, 그리고 아름다운 작은 마을 시옹과 삭송을 보여주었다. 이어서 경건하고 웅장한 성당으로 안내했다. 우리는 작가의 영험한 상상력의 원천을 눈으로 확인하며 환희를 느꼈다. 거기서 만난 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바레스가 백 년을 넘어 여전히 뜨거운 논쟁의 대상인 것도 확인했다.
“천재 작가죠. 폐허가 된 고향 땅에 활력과 영성을 불어넣은 사람입니다. 물론 그의 민족주의 사고思考가 따가운 비판의 대상이기도 했지요.”
그들의 말끝은 작품을 번역하는 동안 많은 질문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레오폴 바이야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불행한 그이는 하느님이 비밀로 간직하신 것들에 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임종 직전의 오브리 신부의 말 역시 바레스가 주목한 인물이 누구인지 연신 묻도록 한다. 무너진 종교의 폐허 위에 선 바이야르? ‘기록으로서의 성서聖書’를 넘어 대자연과 성령의 합일을 꿈꾼 뱅트라? 소설가 귀 뒤프레Guy Dupre´의 말에 따르면, 바레스가 신비주의와 신권, 토속적 신앙과 기독교의 모순적인 힘을 조율한 곳이 바로 언덕이었다.
“나는 이 땅 그리고 머나먼 조상들의 영이고, 자유이며 영감이니 ….”
초원 언덕의 말을 대변하는 바레스의 말은 여행하는 동안 사유와 몽상을 가득 채워 주었다.
우리는 성스러운 마을들을 순례자처럼 돌아다녔다. 루르드, 고르드, 푸르비에르 언덕이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일요일은 마을 성당의 미사에 참여했다. 시적 풍광을 지닌 매력적인 마을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시옹의 언덕 아랫마을 삭송의 커다란 곡식 창고 이름 La Grange inspire´e 영감이 흐르는 곳간! 바레스의 소설 『영감이 흐르는 언덕』 이름에서 따온 간판이 눈에 띄었다.
“문학이 마을을 꽃 피우는구나 ….”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사는 마을을 내내 생각했다.
바레스의 소설 제목을 활용한 예는 또 있다. 벨기에 출신 작가이며 정치가인 피에르 노톰은, 신앙의 유적지 루브루아의 몽켄탱을 ‘영감이 흐르는 언덕’이라 명명했으며, 드골 대통령은 1944년, 전쟁 직후 소르본 대학교 연설에서 “영이 숨 쉬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예로부터 소망해 온, 그리고 지금도 갈망하는 바를 증언하는 장소들입니다. 그 빛나는 곳 가운데 소르본은 으뜸의 자리입니다.”라는 말로써, ‘폐허의 프랑스는 무너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강인한 영(에스프리)을 지니고 있음을’ 웅변했다.
『영감이 흐르는 언덕』은 일종의 주문呪文의 힘이 흐르는 시적 소설이다. 바레스는 민족의 에너지를 일깨우고, 땅이 지닌 신성성을 부추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주단’을 교회뿐만 아니라 교회 밖 대지에도 활활 펼쳐놓은 작가이다. 그의 문학은 종종 ‘하늘에 매혹되면서도 대지에 뿌리내린 존재들’을 보여준다. 그의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 시옹 언덕의 풍광을 통해 보여주는 영적 아우라를 조금도 흐리지 않는다.
언덕은 우리의 삶과 신앙을 상징한다. 그것은 한 영혼이 하느님에게 도달하는 통로이리라. 우리 두 번역자는 시옹의 언덕에 우뚝 선 바레스 기념비의 글귀를 큰 소리로 외며 내려오던 뜨거운 날을 기억한다. 바레스는 말했다.
“여기, 들판을 두르는 지평선, 그것은 온 삶을 감싸는 것이니, 끝없는 우리의 갈망에 영광의 자리를 내어주노니, 동시에 우리의 한계를 일깨우노니.”
그는 또 말했다.
“나는 한 지역을 언제나 그 고유한 신성으로 일깨우고, 다시 인간의 숨결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항상 자연에 대항하는 인간의 투쟁이다. 나는 때로는 자연을 예찬하고, 때로는 자연을 사로잡으며, 거기에 내 영靈을 담기 원한다.”
프랑스에서는 20세기 내내 사르트르나 푸코 같은 파리Paris의 지식인들이 문화적 주류였다. 바레스 같은 이들은 그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지역 작가라는 별명이 붙었다. 바레스 역시 한때 종교 소설가나 국수주의 작가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글로벌’보다 ‘로컬’, 지구촌보다 내 나라에 천착한 작가에 우리는 주목했다. 그리고 『영감이 흐르는 언덕』을 번역하면서, ‘지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말을 다시 생각하며, 한 작은 마을의 서사에 오랜 세월 천착해 온 바레스에게 꽤 오래 ‘꽂혀’ 살았다.
모름지기 『영감이 흐르는 언덕』은 우리의 영혼을 무력無力에서 활력活力, 활활력活活力으로 이끄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프랑스 국민이 알자스와 로렌느를 프러시아에 빼앗기고 보주산맥의 능선을 바라보던 시절, 대박이 난 작품이다. 한때, ‘반세기 최고의 소설 그랑프리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영감靈感은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순리와 자연에 맞서는 것이다. 때로는 불편함과 고통과 시기와 질투를 감수하는 것이다. 영감은 영광과 활력과 상승을 예고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옹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한 세월 폐허인 상태였다. 십자군의 영광도, 프랑크 공국의 최고 통치자의 존엄도 묻혀있었다. 마을 사람들도 폐허에 익숙해 있었다. 그 때, 레오폴 바이야르는 시옹의 언덕에서 지역의 옛 위인들이 이루었던 번영, 그리고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로스메르타 여신을 섬겼던 마을 부흥의 복원을 꿈꾸었다. 제도적 권위에 맞서고, 재정난에 허덕이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바이야르 형제들은 언덕에서 신앙적 영감을 얻게 된다. 시옹의 로스메르타와 성모마리아를 동시에 섬겨온 조상들의 힘을 재발견한 것이다. 그 에너지로 40여 년, 스스로 선택한 고통의 삶을 지켜냈다.
『영감이 흐르는 언덕』은 표면적으로는 종교적 논쟁이 화두이지만, 실은 독특한 영성을 지닌 뱅트라와 틸리 언덕으로부터 받은 영감으로 오래 전부터 ‘우리의 언덕’에 존재해 온 영성을 복원해가는 바이야르 형제들의 이야기이다.
시옹의 언덕은 ‘거스름’을 부추기는 곳이다. 언덕의 정상에 서면 거칠 것이 없어보인다. 멀리는 광활한 보주산맥이 보이고, 가까이는 긴 밭고랑처럼 굽이치는 평야가 내려다 보인다. 여기서는 누구라도 활력을 느낄 수 있다.
영감을 얻으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레오폴 바이야르 형제 사제들의 삶이 시옹의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의미가 있었을까?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주는가? 시옹의 언덕은 오늘도 몽상과 사유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끝없는 영감을 제공하는 곳임에 틀림 없다.
두 번역자는 쉼 없이 토론하며 작업했다. 그리고 하느님, 영(에스프리), 대지, 이 세 개념을 상징하는 단어 ‘언덕’을 내내 생각했다. 아메리카 흰 얼굴의 사람들이 전해주기 훨씬 이전, 우리 선조들의 가슴에, 우리의 대지에 이미 존재해 온 하느님, 영!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장지오노Jean Giono와 동시대에 빛나는 공간의 시학을 일군 모리스 바레스가 선물한 몽상의 힘으로 오늘도 우리는 사유의 언덕을 올올히 오른다.
2026년 5월 박용주 · 홍순도
영감이 흐르는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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