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말들이그를대신설명한다
소설『연결,유예,악의』는자신을설명할줄모르는한인간,임다리의삶을따라간다.그는어린시절부터돌다리,사다리,임꺽정,임자,임마씨,판다같은호칭으로불려왔다.누군가가붙인이름들은시간이흐르며그를규정하는방식이된다.다리는그이름들을적극적으로거부하지못한다.대신자신이정말그런사람인지오래생각한다.그러나결정적인순간마다말하지못했고,그렇게놓친말들은그의안에남는다.
어린시절의다리는공터에서한아이와연결될뻔하지만,끝내아무말도하지못한채홀로남겨진다.누군가와이어지고싶었던마음은표현되지못하고유예된다.그러나유예된감정은사라지지않는다.더깊은곳에가라앉아있다가훗날다른이름과사건의얼굴로돌아온다.
성인이되어채권추심의세계로들어간다리는채무자들을압박하는자리에서있으면서도자신이무엇을하는지명확히설명하지못한다.그저주어진역할을수행할뿐이다.그러던어느순간,사람들은그를‘악귀’라부르기시작한다.
처음에는우연한호칭처럼보인다.하지만사람들은다리를그렇게인식하기시작하고,그인식은점차현실처럼굳어진다.그가나타난자리에서누군가의채무가사라지고,삶이뒤틀리며,설명하기어려운결과들이이어진다.다리는자신을악귀라고생각하지않지만,타인의시선속에서이미그렇게작동한다.‘악귀’라는이름은그의얼굴과행동을해석하는기준이되고,마침내존재자체를대신한다.
타인의말들은어떻게한인간의운명이되는가
『연결,유예,악의』는한인간이어떻게‘악’으로연결되는지를추적한다.악은어느날갑자기나타나는괴물이아니라관계와사건,우연과선택,구조와시선이겹쳐만들어지는결과일수있다.어린시절부터쌓여온여러호칭과관계의균열,채권추심이라는구조적폭력은다리를한방향으로밀어간다.연결은선택이아니라조건이며,한번형성된연결은쉽게끊어지지않는다.
16년의형을살고돌아온다리는병원주차장의야간정산원으로숨어살듯지낸다.그러던어느날일곱살아이배서가그의앞에나타난다.불안정한가정에서방치와폭력의기척을감지하며살아가는아이는다리를‘영웅’으로바라본다.다리에게그것은처음으로감사히받아들이고싶은이름이다.악귀도판다도임마씨도아닌영웅.누군가에게두려움이아니라구원의가능성으로불리는일이다.
그러나영웅이라는이름은곧요구가된다.배서는가족이하나가되기를바라고,다리는아이의상처와거짓말,자신의회피와과거악귀의방식사이에서흔들린다.구하고싶다는마음은언제부터개입이되는가.선의는언제폭력과구분되지않게되는가.
모든이름이무너진자리,한인간의공백이드러난다
작품은다리를악인이나피해자,방관자나구원자가운데하나로단정하지않는다.그는악귀와영웅사이에,연결과단절사이에,선택과유예사이에놓여있다.타인이붙인이름을받아들이며살아온그는끝내자신을설명하지못한채기나긴공백속으로걸어들어간다.
그래서이이야기는『연결,유예,악의』다
이소설은세개의힘으로움직인다.연결은사람과사건,과거와현재를묶는다.유예는감정과진실,선택과책임을뒤로미룬다.그리고악의는그모든연결과유예가끝내향하는어두운방향처럼모습을드러낸다.
이작품이끝까지묻는것은단순히누가악한가가아니다.악귀로불린인간은끝까지‘나는악귀가아니다’라고말할수있는가.영웅으로불린인간은그이름만으로누군가를구할수있는가.
연결은지속되고유예는끝나지않는다.『연결,유예,악의』는그끝에서인간이무엇이되는지를묻는다.어쩌면악의는특별한괴물에게서태어나는것이아니라,너무오래설명되지못한한인간의이름들사이에서조용히자라고있었는지도모른다.
지금,이소설
우리는사람을오래바라보기보다빠르게규정하는데익숙하다.몇마디의소문과한번의실수,하나의이력만으로한인간의전부를판단하고,그판단을좀처럼거두지않는다.『연결,유예,악의』는그성급한확신이어떻게한사람의얼굴을만들고,마침내삶의방향까지바꾸는지를보여준다.
이소설은이해보다규정이앞서는우리의태도를되돌아보게한다.한인간을끝까지단정하지않는일,그가스스로말할때까지판단을유예하는일.그것이야말로지금우리에게필요한윤리인지도모른다.
우리는너무빨리타인을완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