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평생토록 여러 거처(居處)를 옮겨 다닌 사람이었다. 마재(馬峴)에서 나고 자라 한양에서 벼슬하였으며, 신유년(辛酉年)의 화(禍)로 강진(康津)에 유배되어 십팔 년을 떠돌다, 마침내 고향의 여유당(與猶堂)으로 돌아와 만년을 보냈다. 그가 머문 곳마다 이름이 있었으니, 역경 속에서도 몸가짐을 가다듬고자 한 사의재(四宜齋)가 있었고, 만덕산 기슭에서 학문을 일으킨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었으며, 삼가고 조심하는 뜻을 담은 여유당이 있었다. 그 거처의 이름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산에게 집이란 단지 몸을 누이는 곳이 아니라 마음을 닦고 뜻을 세우는 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세월 부동산법과 토지·주거 제도를 연구하고 가르쳐 온 나는, 늘 제도와 정책으로서의 주거를 다루어 왔다. 그러나 그 논의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백성이 어디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다다르게 되고, 그 물음에 가장 깊고 절실하게 답한 이가 바로 다산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산은 책상 위의 공허한 이론에 머물지 않고, 실(實)에 발을 딛고 백성(民)의 삶을 두텁게 하는(厚生) 길을 평생의 학문으로 삼은 사람이다. 그의 주거 사상은 곧 그의 실학(實學) 전체를 비추는 거울이라 할 만하다.
다산의 거처론(居處論)은 세 기둥 위에 서 있다. 첫째는 실(實)이다. 허례와 허식을 버리고 쓸모와 성실로써 집을 꾸리는 일이니, 이는 곧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정신이 주거에 깃든 것이다. 둘째는 민(民)이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民本)의 신념 위에서, 그는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애민(愛民)과 진황(賑荒)을 통해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의 거처를 먼저 살폈다. 셋째는 제도(制度)의 개혁이다. 토지의 겸병(兼倂)으로 백성이 삶의 터전을 잃어 가던 시대에, 그는 여전제(閭田制)와 정전제(井田制)의 구상을 통해 토지와 주거의 안정을 함께 도모하고자 하였다. 실(實)로 거하고, 민(民)을 편안케 하며, 마땅함을 좇아 제도를 고치는 것 - 이것이 다산이 우리에게 남긴 거주 철학의 요체이다.
오랜 세월 부동산법과 토지·주거 제도를 연구하고 가르쳐 온 나는, 늘 제도와 정책으로서의 주거를 다루어 왔다. 그러나 그 논의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백성이 어디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다다르게 되고, 그 물음에 가장 깊고 절실하게 답한 이가 바로 다산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산은 책상 위의 공허한 이론에 머물지 않고, 실(實)에 발을 딛고 백성(民)의 삶을 두텁게 하는(厚生) 길을 평생의 학문으로 삼은 사람이다. 그의 주거 사상은 곧 그의 실학(實學) 전체를 비추는 거울이라 할 만하다.
다산의 거처론(居處論)은 세 기둥 위에 서 있다. 첫째는 실(實)이다. 허례와 허식을 버리고 쓸모와 성실로써 집을 꾸리는 일이니, 이는 곧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정신이 주거에 깃든 것이다. 둘째는 민(民)이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民本)의 신념 위에서, 그는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애민(愛民)과 진황(賑荒)을 통해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의 거처를 먼저 살폈다. 셋째는 제도(制度)의 개혁이다. 토지의 겸병(兼倂)으로 백성이 삶의 터전을 잃어 가던 시대에, 그는 여전제(閭田制)와 정전제(井田制)의 구상을 통해 토지와 주거의 안정을 함께 도모하고자 하였다. 실(實)로 거하고, 민(民)을 편안케 하며, 마땅함을 좇아 제도를 고치는 것 - 이것이 다산이 우리에게 남긴 거주 철학의 요체이다.
다산 정약용의 집과 마음 (실학으로 읽는 거주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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