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유영모의한글철학과주체적기독교
다석유영모는1890년(고종24)서울에서태어나어린시절유학경전을공부했고,16세가된1905년에는YWCA에서기독교를접하고일본어를공부하는등다양한학문을고루섭렵했다.23세때에는일본으로유학을떠나동경물리학교에서1년을공부하고일본의기독교선교사이자무교회주의자인우찌무라칸조오(?村鑑三)를만나교류했고,27세에는상하이로망명해독립운동을전개했다.30세에는오산학교교장으로취임했지만1920년일제에의해학교가폐교되면서물러난다.그즈음신채호·최남선·이승훈·김교신·함석헌등다양한분야의인물을두루사귀었는데,그뒤로는서울외곽으로터를옮긴뒤동서양의고전연구와예수정신을바탕으로한본인의신앙관을세우는데에온힘을쏟았다.
유영모는서구기독교사상을오래천착했으나그의사상은비단기독교에기울지않았다.동서회통의사상가로평가받는만큼동양적사유의비중이적지않다.『도덕경』『천부경』등을순한글로번역했고『맹자』를탐독했다.이같은동양고전공부는‘없음’[無]에세계에대한시야를넓혀주었고이는유영모를대표하는‘없이계신하느님’이라는개념을만드는데에일조했다.유영모는맹자의심성론,노자의‘없음’등을기독교에접목했고,『천부경』으로부터는하늘과인간의관계를모색할단서를얻어고유의‘다석사상’을세웠다.천·지·인의3요소를적극받아들였고한글의음운변화가이에맞닿음을깨닫고한글을통해본인의사상을적극적으로드러내기시작했다.성경과불경이아무리뛰어난말씀이더라도그것은‘남의소리’에불과하니우리의소리를새로만들어야한다는것이었다.특히소리글자(표음문자)인한글을뜻글자(표의문자)로재해석하면서이를‘백성을하늘로이끄는글[天文]’혹은‘바른소리[正音]’라고말했다.
한편유영모의‘없음’철학은이성과존재자중심의서구철학과는결을달리한다.유영모편의엮은이이정배는이에대해“없음’(허공)을성스러운영역으로본것은기후붕괴시대의구원을위한탁견”(25면)이라고평가한다.‘없음’은곧현대자본주의의욕망을거스르는자연을향한목소리이자생태적각성이라는뜻이다.이없음은‘나는없고모두가있는’유영모의대동사상으로연결된다.나를비우고대동(큰하나)의하느님에게향하면유영모가꿈꾼대동세계가열린다는것이다.
유영모의저술은,그의제자들이그의강연록을풀어엮은몇권의책을제외하고는1955년부터1975년까지그가쓴일기를『다석일지』로엮은것이전부다.이책에는『다석일지』를일부발췌하고『다석일지공부』(김흥호지음)에서도몇편의한글시를옮겨와서유영모사상의일부를접할수있도록했다.
장공김재준의인권과자유
김재준은1901년(고종38)함경도경흥에서태어나10세까지아버지로부터한학을배웠다.10세가되던1910년부터는신식학교에서공부했고15세에는회령군청에서공무원생활을시작하고곧이어결혼했다.하지만배움에대한열망이컸던김재준은20세때서울로상경하여고등학교에입학하고기독교를접하게된다.함경도로귀향하여소학교등에서교사로근무하면서도신학공부를게을리하지않던그는25세에는일본청산학원으로,27세에는미국웨스턴신학교로유학을떠나신학석사학위를받고31세에귀국한다.귀국후평양에서목회활동을시작한그는곧이어만주의독립운동가들과긴밀히연결되어여러다양한민족주의활동을전개했다.
1945년해방을맞은뒤에는한국사회에본격적으로진보적입장의신학을알리기시작하는데,김재준은당시한국교회에팽배했던근본주의신학의풍토를비판했다.근본주의는19세기한국에개신교를전파한미국선교사들이품었던신앙기조로,성경과전통적교리의절대적권위를중시하고이와다른의견에대단히배타적인입장을가진사조다.김재준은이같은근본주의신학의오류를고치기위해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전신)를주무대로‘성서비평’의필요를역설했고,이로써근본주의적장로교선교사들과결별하면서‘한국기독교장로회’가출범하는계기가된다.
김재준은기독교성경을풀이하면서그것이인간개개인내면의죄의식,두려움을떨쳐내게끔해주는언어임과동시에사회구조적인모순,정치적억압등에서벗어나게끔해주는해방의언어라고주장했다.그리고20세기중반한반도에불어닥친민족상잔의전쟁과민주주의쇠퇴등에맞서기독교인들이참여의식을가져야한다고강조했다.하나님이인간과세상을구원하고있으니이같은구속사적관점에서인간또한각자에게주어진자유를사용해이웃에게봉사할것을권했다.교회는교회바깥의사회에관심을가져억울하게피해를당한시민들을대변하고,모든불의한세력에맞서비폭력으로항거해야한다는것이다.이를위해김재준본인이앞장서서1970년대와80년대에군사독재정권에맞서벌인민주화운동은종교계가한국민주주의수호에이바지한대표적사례로언급된다.
이이효재의평등과평화통일,공동체라는꿈
이이효재는1924년경남마산에서태어나기독교목사인아버지와고아들을돌보던어머니밑에서성장했다.특히아버지의교회로찾아오는가정폭력피해자들을지켜보며자연스럽게여성문제를해결하는일에참여하고싶다는꿈을품게되었다.1945년이화여대영문학과에입학하고1948년미국으로유학해1957년귀국한뒤에곧이어이화여대사회학과교수로취임했다.이같은유학생활이본인에게주어진특별한혜택임을냉정하게돌아본이이효재는다시금자신이여성들과소외계층을위해살아가야한다는점을다짐했다.
한국에돌아오자마자1950,60년대한국사회의역동적변화를지켜보면서미국유학시절에접한구조기능주의가이같은현상을이해하는데에도움이되지않음을깨달았다.그리하여한국사회학의과제를‘보통의사람들이품은한(恨)’을푸는것으로설정해한평생그과제를해결하는길에매진한다.하지만당시군사독재정권은경제성장을이유로노동자들의권리를억압하고있었다.이에맞서이이효재는강단에만머무르지않고거리로나서는실천활동을적극적으로전개했다.가부장적사회구조를지탱하던호주제를폐지하는운동에앞장섰고,일본군성노예문제를국제사회에폭로했으며,생활협동조합운동등을통해여성들의사회진출과생태적먹거리문제를해결하고자했다.
이이효재는이같은실천활동을열렬히벌여감과동시에‘한국사회학’을주창하며한국사회의구조적인모순을이론적으로분석하고그대안을마련하고자분투했다.다만당시선진국의사회학적이론틀로는한국고유의비민주성과분단상황을해석하기에어려움이있었다.이같은이론과담론의부족에대해이이효재는분단을주제로다양하게출간되고있던한국의문학작품들에눈길을돌린다.또한분단시대의역사인식을설파하는강만길교수등의분단사학에도관심을갖는다.이같은통찰을거듭하며한국사회학을세우기위해서는분단문제를반드시통과해야함을깨닫는다.
이이효재는분단극복과평화통일이한반도민족전체의삶을개선하는첫걸음이라고보았고,자신의한국사회학을‘분단시대의사회학’으로재명명하면서본인이천착할주제를좀더세분화한다.또한분단체제하민족의고통을‘한(恨)’으로규정하고한반도의민중,특히여성이이한으로부터벗어나는과정을인간해방의실현으로보았다.그가주창한‘분단시대의사회학’은‘분단시대여성학’‘분단시대가족사회학’등으로분화하면서한국학술계의독보적이면서중요한업적으로남았다.
문명전환의과제에서세계적보편성을획득하고자하는
창비한국사상선의도전적기획
지구기후와자본주의가불가분의위기를맞닥뜨리고각종갈등이팽배한지금이시대에우리가떠맡은과제는결코가볍거나단순하지않다.백낙청(서울대명예교수)을필두로하는창비한국사상선간행위원회는이모든위기를돌파하기위해수행해야할과제를다음과같이말한다.
‘전환’이라는강력하게실천적인과제는우리모두에게다른삶의전망과지침이필요하며,전망과지침으로살아작동할사상이절실함을뜻한다.그런사상을향한다급하고간절한요청에공명하려는기획으로서,창비한국사상선은한국사상이라는분야를요령있게소개하거나새롭게정비하는평시적작업을넘어어떤비상한대책이기를열망하며구상되었다.(「창비한국사상선간행의말」에서)
서구사상은오랜시간세계지성계에서압도적발언권을유지하는한편오늘날의위기에대해서도이런저런대응을내놓고있다.그럼에도그강력한위상의이면에강고한배타성과편견이작동하고있음은이제주지의사실이다.사상적인면에서도서구가가진위상은돌이킬수없이상대화되었고보편의자리는진실로대안에값하는사상들의분투에열려있다.이시점이야말로유·불·선의회통이나개벽사상등한국사상특유의사상적기획이한국사상이전지구적과제를향해독자적인목소리를보태기에더없이적절한때일것이다.
창비한국사상선사상가들의사유에는역사와현실을탐문하며새로운삶의보편적전망을구현하려한강인한실천성,그리고사회를변혁하는일과개개인의마음을닦는일이진리를향한단일한도정에있다는깨달음이깊이새겨져있다.한반도의경험과지혜가응축된사상적활력을드러내는창비한국사상선이문명전환의개벽적인사유와실천의지평을열어가는데의미있는밑거름이되기를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