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고전문학의 진수, 당시唐詩가 전해주는 깊은 감동과 삶의 지혜
『멱라강에 던져 보낸 시 한편 - 노년의 눈으로 다시 읽는 당시』는 중국 문학을 전공하고 계명대, 한양대, 서강대 교수로 재직한 뒤 정년퇴임한 저자가 중국 당나라(618~907년) 때 생산된 명시들을 가려 뽑아 우리말로 옮기고 작품 한 편 한 편을 자세히 읽은 책이다. 두보, 이백, 백거이를 비롯한 시인 29명의 작품 60편이 여기 모여 있다.
책의 표제는 여기에 실린 시 가운데 두보가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유배 가던 동료 시인 이백을 위해 쓴 「천말회이백天末懷李白」(하늘 끝 땅에서 이백을 생각하며)의 마지막 구절, “마땅히 억울한 혼과 함께 말이라도 나누어야 할지니 / 시 한 편 던져서 멱라강으로 보내시구려”(應共冤魂語, 投詩贈汨羅)에서 가져온 것이다. 멱라강汨羅江은 전국 시대 초나라의 대시인 굴원(기원전 343?~기원전 277?)이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이다. 간신들에게 모함을 받아 추방당한 처지였던 그는 초나라가 진나라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절망한 나머지 이 강에 투신한 것이다. 그 뒤 굴원의 우국충정을 기리려는 사람들이 음력 5월 5일 단옷날이 되면 찹쌀떡을 댓잎에 싸서 강물에 던졌다고 한다. 물고기들에게 이것을 먹고 굴원의 시신을 건드리지 말라는 뜻에서다. 두보는 이 의식처럼 시 한 편 써서 강물에 던져 보내 똑같은 억울함을 겪은 또 다른 천재 시인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라고 권유함으로써 벗 이백을 위로한 것이다. 그러니까 멱라강은 중국 시의 한 뜨거운 상징이자 성소聖所인 셈이다. 달리 보면, 굴원이 만든 전통을 잇고 또 굴원처럼 중국 시의 성소에 모셔지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이 책에 실린 모든 작품들을 ‘멱라강에 던져 보낸 시 한 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저자는 바로 그런 뜻을 제목에 담으려 했다고 여겨진다.
저자는, 시 자체의 완성도는 당나라보다 앞선 육조六朝 시기의 작품이 당시보다 더 높지만 언어가 어려워 사람들이 입에 수시로 올리기 쉽지 않은 흠이 있었고, 당나라 이후 송나라 때 나온 시들은 일상어의 상투성을 뛰어넘지 못해 참신함을 보여주는 데 아쉬움을 남긴 반면, 당시는 “상당히 구어화된 말로 전에 없던 세상을 보여주었기에”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대대로 애송되어왔다고 본다. 천 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사이에 둔 데다 역사와 문화가 다른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 시들이 큰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이 책, 『멱라강에 던져 보낸 시 한편 - 노년의 눈으로 다시 읽는 당시』에서 저자가 하고 있는 일이다. 그는 헤겔과 니체의 철학, 자크 라캉이나 롤랑 바르트의 현대 이론을 참조하고, 지금의 세상과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을 끊임없이 소환·환기하는 가운데, 여기 실린 시인들이 고뇌하고 노래했던 바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의 문제들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런 면모가 이 책을 범상한 당시 해설서가 아니라 우리 시대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품고 있으면서도 흥미롭게 읽히는 비평적 에세이로 만들어준다.
저자가 책 전체에 걸쳐 눈길을 주고 있는 주제 중의 하나는 당대의 시인들이 스스로의 불우를 어떻게 시로 승화해냈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여기에 필자가 골라 뽑은 시인들에게서 공통점이 있다면 대부분 불우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불우함에 맞서 싸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주저앉지도 않았다. 단지 그 불우함에서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고, 이윽고 시가 나왔을 뿐이다. 따라서 불후의 명시는 이 불우함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불우함은 그들에게는 일종의 행운이자 축복이었던 셈이다.” “고생스럽게 사는 것을 불행으로”만 여기고 “이웃을 이겨먹는 쾌락을 행복으로 착각”하는 우리 사회의 다수 성원들에게 이해받기 어려운 역설이다. 이 역설의 또 다른 측면은 이 시인들로 하여금 그 어떤 깨달음, 진실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준 불우와 고난이 저자가 여러 편의 글에서 힘주어 말하듯 실은 쾌락의 원천이기도 하며 그것이 그들에게 시를 쓰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예컨대 낮은 벼슬 자리 하나 얻지 못해 한겨울의 산야를 방황하는 시인의 모습을 담은 맹호연의 「부경도중우설赴京途中遇雪」(장안 가는 길에 눈을 만나다)에서 이 역설을 읽어낸다. 시의 마지막에서 시인은 발길을 멈추고 절대적인 고독 속에 ‘하릴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데, 이를 두고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순간이 시로 씌었다는 것은 곧 그 짧은 순간에 영원을 사는 쾌락을 경험했음을 의미한다. 공자는 일찍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더라도 괜찮다”(朝聞道, 夕死可矣)고 말했다. 시인이 경험한 그 짧은 시간에 이미 영생이 있었기에 그에게 남이 몰라주는 서운함이나 외로움 같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또 두보의 명시로 이름 높은 「등고登高」를 다룬 글에서도 시인이 결핍 속에서 얻어낸 쾌락을 발견한다. 〈이 시의 수련부터 묘사해온 가을의 정경은 비록 홀로 쓸쓸히 올라와 감상한 것이긴 해도 애절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것이 그토록 아름다웠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시인이 고향을 떠나 홀로 힘든 피난살이를 했기에, 그리고 늙고 병들어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결정적인 결핍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시인에게 이러한 경험은 곧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이었을 터인즉, 삶에의 충동은 여기서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독한 술도 아닌 탁주 잔을 들고 망설인 것이니, 이 갈등하는 모습이 인생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닐까? 힘들고 고생스러운 ‘간난艱難’을 불행으로 여기고 쾌락을 돈을 주고 사는 데 길든 현대인 중에서 이 아름다움과 감동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고통과 변증법적 관계에 있는 쾌락에 대한 저자의 통찰이 돋보이는 곳을 또 하나 든다면 사랑하는 여인 양귀비를 위해 중국 남방의 열대 과일 여지荔枝를 “장거리 쾌속 기마 택배”로 가져오게 한 임금 현종의 일화를 다룬 두목杜牧의 시 「과화청궁過華淸宮」을 통념대로 단순한 풍자시로 보기를 거절하는 대목이다. 저자는 오히려 “이 애정 사건은 쾌락을 향한 인간의 추구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실례實例”라고 보면서 ‘즐기는 일이라면 이 정도 상상력은 가져야 하지 않겠나’ 하는 시인의 은밀한 탄복을 찾아낸다. 왕의 “실정이니 뭐니 하는 윤리적인 면은 기실 시인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오로지 감각의 실현을 위한 창조적 상상력이 중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가 하는 일이 바로 “새로운 감각을 창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한다면 세계를 충만하게 또 새롭게 감각함으로써 그것을 읽는 우리의 감각도 쇄신시키는 것이 시의 일일 터다. 풀잎 하나, 이슬 한 방울도 새로 만나고 새로 보게 만드는 것이다. 저자는 간난과 고통 속에서도 이 책의 주인공들이 시를 쓰고 새로운 감각을 선보일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삶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사랑하는 일에도 배움이 필요하고 기술이 요구된다면,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는 바로 그처럼 삶을 사랑하는 방법과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임을 저자는 설득력 있게 말해주고 있다.
책의 표제는 여기에 실린 시 가운데 두보가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유배 가던 동료 시인 이백을 위해 쓴 「천말회이백天末懷李白」(하늘 끝 땅에서 이백을 생각하며)의 마지막 구절, “마땅히 억울한 혼과 함께 말이라도 나누어야 할지니 / 시 한 편 던져서 멱라강으로 보내시구려”(應共冤魂語, 投詩贈汨羅)에서 가져온 것이다. 멱라강汨羅江은 전국 시대 초나라의 대시인 굴원(기원전 343?~기원전 277?)이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이다. 간신들에게 모함을 받아 추방당한 처지였던 그는 초나라가 진나라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절망한 나머지 이 강에 투신한 것이다. 그 뒤 굴원의 우국충정을 기리려는 사람들이 음력 5월 5일 단옷날이 되면 찹쌀떡을 댓잎에 싸서 강물에 던졌다고 한다. 물고기들에게 이것을 먹고 굴원의 시신을 건드리지 말라는 뜻에서다. 두보는 이 의식처럼 시 한 편 써서 강물에 던져 보내 똑같은 억울함을 겪은 또 다른 천재 시인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라고 권유함으로써 벗 이백을 위로한 것이다. 그러니까 멱라강은 중국 시의 한 뜨거운 상징이자 성소聖所인 셈이다. 달리 보면, 굴원이 만든 전통을 잇고 또 굴원처럼 중국 시의 성소에 모셔지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이 책에 실린 모든 작품들을 ‘멱라강에 던져 보낸 시 한 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저자는 바로 그런 뜻을 제목에 담으려 했다고 여겨진다.
저자는, 시 자체의 완성도는 당나라보다 앞선 육조六朝 시기의 작품이 당시보다 더 높지만 언어가 어려워 사람들이 입에 수시로 올리기 쉽지 않은 흠이 있었고, 당나라 이후 송나라 때 나온 시들은 일상어의 상투성을 뛰어넘지 못해 참신함을 보여주는 데 아쉬움을 남긴 반면, 당시는 “상당히 구어화된 말로 전에 없던 세상을 보여주었기에”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대대로 애송되어왔다고 본다. 천 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사이에 둔 데다 역사와 문화가 다른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 시들이 큰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이 책, 『멱라강에 던져 보낸 시 한편 - 노년의 눈으로 다시 읽는 당시』에서 저자가 하고 있는 일이다. 그는 헤겔과 니체의 철학, 자크 라캉이나 롤랑 바르트의 현대 이론을 참조하고, 지금의 세상과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을 끊임없이 소환·환기하는 가운데, 여기 실린 시인들이 고뇌하고 노래했던 바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의 문제들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런 면모가 이 책을 범상한 당시 해설서가 아니라 우리 시대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품고 있으면서도 흥미롭게 읽히는 비평적 에세이로 만들어준다.
저자가 책 전체에 걸쳐 눈길을 주고 있는 주제 중의 하나는 당대의 시인들이 스스로의 불우를 어떻게 시로 승화해냈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여기에 필자가 골라 뽑은 시인들에게서 공통점이 있다면 대부분 불우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불우함에 맞서 싸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주저앉지도 않았다. 단지 그 불우함에서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고, 이윽고 시가 나왔을 뿐이다. 따라서 불후의 명시는 이 불우함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불우함은 그들에게는 일종의 행운이자 축복이었던 셈이다.” “고생스럽게 사는 것을 불행으로”만 여기고 “이웃을 이겨먹는 쾌락을 행복으로 착각”하는 우리 사회의 다수 성원들에게 이해받기 어려운 역설이다. 이 역설의 또 다른 측면은 이 시인들로 하여금 그 어떤 깨달음, 진실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준 불우와 고난이 저자가 여러 편의 글에서 힘주어 말하듯 실은 쾌락의 원천이기도 하며 그것이 그들에게 시를 쓰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예컨대 낮은 벼슬 자리 하나 얻지 못해 한겨울의 산야를 방황하는 시인의 모습을 담은 맹호연의 「부경도중우설赴京途中遇雪」(장안 가는 길에 눈을 만나다)에서 이 역설을 읽어낸다. 시의 마지막에서 시인은 발길을 멈추고 절대적인 고독 속에 ‘하릴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데, 이를 두고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순간이 시로 씌었다는 것은 곧 그 짧은 순간에 영원을 사는 쾌락을 경험했음을 의미한다. 공자는 일찍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더라도 괜찮다”(朝聞道, 夕死可矣)고 말했다. 시인이 경험한 그 짧은 시간에 이미 영생이 있었기에 그에게 남이 몰라주는 서운함이나 외로움 같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또 두보의 명시로 이름 높은 「등고登高」를 다룬 글에서도 시인이 결핍 속에서 얻어낸 쾌락을 발견한다. 〈이 시의 수련부터 묘사해온 가을의 정경은 비록 홀로 쓸쓸히 올라와 감상한 것이긴 해도 애절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것이 그토록 아름다웠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시인이 고향을 떠나 홀로 힘든 피난살이를 했기에, 그리고 늙고 병들어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결정적인 결핍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시인에게 이러한 경험은 곧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이었을 터인즉, 삶에의 충동은 여기서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독한 술도 아닌 탁주 잔을 들고 망설인 것이니, 이 갈등하는 모습이 인생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닐까? 힘들고 고생스러운 ‘간난艱難’을 불행으로 여기고 쾌락을 돈을 주고 사는 데 길든 현대인 중에서 이 아름다움과 감동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고통과 변증법적 관계에 있는 쾌락에 대한 저자의 통찰이 돋보이는 곳을 또 하나 든다면 사랑하는 여인 양귀비를 위해 중국 남방의 열대 과일 여지荔枝를 “장거리 쾌속 기마 택배”로 가져오게 한 임금 현종의 일화를 다룬 두목杜牧의 시 「과화청궁過華淸宮」을 통념대로 단순한 풍자시로 보기를 거절하는 대목이다. 저자는 오히려 “이 애정 사건은 쾌락을 향한 인간의 추구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실례實例”라고 보면서 ‘즐기는 일이라면 이 정도 상상력은 가져야 하지 않겠나’ 하는 시인의 은밀한 탄복을 찾아낸다. 왕의 “실정이니 뭐니 하는 윤리적인 면은 기실 시인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오로지 감각의 실현을 위한 창조적 상상력이 중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가 하는 일이 바로 “새로운 감각을 창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한다면 세계를 충만하게 또 새롭게 감각함으로써 그것을 읽는 우리의 감각도 쇄신시키는 것이 시의 일일 터다. 풀잎 하나, 이슬 한 방울도 새로 만나고 새로 보게 만드는 것이다. 저자는 간난과 고통 속에서도 이 책의 주인공들이 시를 쓰고 새로운 감각을 선보일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삶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사랑하는 일에도 배움이 필요하고 기술이 요구된다면,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는 바로 그처럼 삶을 사랑하는 방법과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임을 저자는 설득력 있게 말해주고 있다.
멱라강에 던져 보낸 시 한 편 : 노년의 눈으로 다시 읽는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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