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터리어스 RBG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삶과 시대)

노터리어스 RBG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삶과 시대)

$27.41
Description
미국 연방대법관 루즈 베이더 긴즈버그의 평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 이른바 노터리어스 RBG의 악명은 몇 마디 위대한 말과 잘 고안된 카리스마, 뜻밖의 팬덤으로 어느 날 갑자기 얻어진 것이 아니다. 『노터리어스 RBG』는 베일에 가려졌던 그의 삶을 날것 그대로 세밀하게 펼쳐놓은 책으로 엄격한 자료 조사와 취재를 거쳐 탄생한 평전이다.

1993년 빌 클린턴 정권 때 연방대법원 대법관에 임명된 RBG는 변호사 시절부터 연방대법관을 역임하는 동안 임금차별, 부당한 처우, 이중 잣대, 임신중절 금지, 사회보험 등 여러 분야에서 젠더 평등과 여성 및 남성의 해방을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수많은 청년 페미니스트와 진보주의자가 그의 이름으로 자유와 평등을 외쳤고, 그가 내놓는 소수의견에 열광했다.

이 책을 쓴 두 저자는 한 훌륭한 개인의 공적 자아와 사회적 성취만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지탱해주는 그 주변의 다른 훌륭한 개인들과 그 자신의 매력적인 사적 자아, 취미와 취향, 생활방식까지 경쾌하게 소개한다. 대통령 연두교서 때 꾸벅꾸벅 조는 모습, 집무실에서 터번을 쓰고 나타나 재판연구원들이 웃음을 참느라 곤욕을 겪은 에피소드, 형편없는 요리 실력과 운전 감각 등 RBG를 단지 훌륭한 위인이 아닌, 어떤 특별한 ‘개인’으로 그려냈다.

북 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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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아이린 카먼

저자 아이린 카먼은 이스라엘 태생의 유대계 미국인으로 2005년 하버드대를 졸업했다. 예일대 로스쿨 방문연구원 시절 재생산정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MSNBC에서 여성, 정치, 법조 담당 기자로 활동하며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수차례 인터뷰했다. 2011년 『포브스』 지가 선정한 ‘주목할 만한 20대 언론인 3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다.

목차

들어가며

1 노터리어스
2 이 바닥에서 오래 굴렀지
3 들려줄 이야기가 있어
4 스테레오타입
5 억압하는 자들에 맞서라, 별을 향해 손을 뻗어라
6 진짜 사랑
7 끝내주는 동료들
8 당신의 말이 나를 홀리네
9 그냥 너의 그 요란한 방식이 마음에 들어
10 하지만 아무래도 그만둘 수가 없어

부록
· RBG처럼 사는 법
· RBG가 가장 좋아하는 마티 긴즈버그 레시피
· “R. B. JUICY”
· 오페라 〈스캘리아/긴즈버그〉에서
· 노터리어스 RBG에게 바침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주
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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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악명의 탄생: 노터리어스 RBG

올바르고 간명하게. 묵묵히, 그러나 치밀하게. 승리에 현혹되지도, 패배에 침윤되지도 않은 채 터무니없는 부조리와 맞서면서도 나날의 행복과 먼 미래의 전망을 포기하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 이른바 노터리어스 RBG의 악명은 몇 마디 위대한 말과 잘 고안된 카리스마, 뜻밖의 팬덤으로 어느 날 갑자기 얻어진 게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긴즈버그의 생애 곳곳에 뚜렷한 흔적으로, 세밀한 무늬로 새겨진 ‘악명 높은 시대’와 맞물려 특별한 조화를 이룬다. 이 책은 베일에 가려졌던 그의 삶을 날것 그대로, 세밀하게 펼쳐놓는다. 변호사 시절 대법관들 앞에서 “여성도 헌법상 동등한 인민이며, 남성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시민적 지위를 누려 마땅하다”고 주장한 지 40여 년, 대법원 수장으로 여든이 넘도록 그의 이름은 의미가 퇴색되기는커녕 점점 더 단단하고 견고한 힘으로 개인들을 연결시킨다. 그러나 RBG도 처음부터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반유대주의를 정서적으로 체험했고, 대학에 들어갔을 땐 매카시즘의 광풍이 캠퍼스를 휩쓸었다. 코넬대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 로스쿨에 단 아홉 명뿐이던 여성 신입생 가운데 한 명으로 입학한 그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화장실도, 도서관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었다. 또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원하는 일자리를 구하는 데 애를 먹어야 했다. 1963년 여성으로서는 두 번째로 럿거스대 로스쿨 정교수로 취임했고, 1972년에는 컬럼비아대 최초의 여성 종신교수가 되었다. 그사이 학생들의 요청으로 ‘여성과 법’을 주제로 한 강의를 개설했는가 하면, 1972년에는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에 여성권익증진단Women’s Rights Project, WRP을 공동 창립하는 등 꾸준히 여성의 권리 신장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1980년 지미 카터 대통령의 지명으로 워싱턴 D.C. 연방항소법원 판사로 취임했으며, 1993년 빌 클린턴 정권 때 연방대법원 대법관에 임명됐다. 변호사 시절부터 연방대법관을 역임하는 동안 임금차별, 부당한 처우, 이중 잣대, 임신중절 금지, 사회보험 등 여러 분야에서 젠더 평등과 여성 및 남성의 해방을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사실상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당선을 의미한 부시 대 고어 사건 판결에서 “역사의 심판을 받고야 말 것”이라는 소수의견을 낭독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연방대법원에서 민주주의와 젠더 평등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 수많은 청년 페미니스트와 진보주의자가 그의 이름으로 자유와 평등을 외쳤고, 그가 내놓는 소수의견에 열광했다. 같은 무렵, 로스쿨 재학생이던 셔나 크니즈닉은 긴즈버그에게 바치는 텀블러 블로그 ‘노터리어스 RBG’를 만들어 그에 관한 기록과 그를 기리는 전 세계 청년 예술가들의 작품을 아카이빙하며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이름을 재조명했다. 이제는 타투에서 웹툰, 핼러윈 코스프레와 (제작 예정인) 할리우드 영화에 이르기까지 법정을 넘어 대중매체에서도 RBG의 이름이 중요한 가치의 상징으로서 오르내린다.

2009년 『포브스』 ‘100인의 영향력 있는 여성’
2015년 『타임』 ‘타임100’ 아이콘
2016년 『포천』 ‘세상을 이끄는 위대한 리더’

“대법관께서는 어떤 분으로 사람들 기억에 남고 싶으십니까?”

“재능을 아낌없이 활용하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맡은 일을 해낸 사람입니다.
우리 사회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입니다.”


들려줄 이야기
어느 투쟁가의 일대기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노터리어스 RBG’로 만든 건, 사소하지 않은 일련의 사건들과 그것을 용인하고 방관한 그의 시대다.
RBG의 어머니 세대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도 합격자가 여성이라면 변호사로 활동할 수 없고, 총부리로 위협받고 납치를 당해도 ‘폭력이 부족하므로’ 강간이 아니며, 여성은 가정생활의 중심이므로 배심원으로 참여하려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시대를 살았다. 루스의 고등학교 졸업식을 하루 앞두고 세상을 떠난 그의 어머니 셀리아 앰스터 베이더는 루스 자신이 “내가 아는 한 가장 똑똑한 사람” “가장 용감하고 강인한 사람”이라고 기억했던 사람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부모의 기대는 온통 맏아들을 향해 있었다. 셀리아는 일찍이 취업해 자신이 번 돈을 코넬대에 다니는 남동생에게 쏟아부었다. 남편 네이선 베이더와 결혼하고는 주변으로부터 사회생활에서 물러나 집안일을 돌보라는 압박을 받는 동시에, 가족을 제대로 부양할 수 없었던 남편의 경제 상황 때문에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어린 루스는 어머니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또 그런 그가 느낀 나날의 시름과 좌절이 얼마나 컸는지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자랐다. 그 시절 많은 어머니가 그들의 딸에게 가르치지 않았으나, 셀리아만은 진지하게 당부했던 한 가지가 있다. “독립적으로 살라”는 것. 어머니는 아무도 모르게 어렵게 모은 8000달러의 학자금을 다른 누구도 아닌 딸 루스의 앞으로 남겼다.

“아내와 어머니로서 주어진 고귀한 직무를 해내라. 그것이 창조주의 법이다.”
_대법관 조지프 브래들리

“창조주와 판사가 어떤 식으로 의사소통하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전혀 없다.”
_RBG


루스는 대학에 들어갔다. 어머니의 남동생이 다녔던 코넬대였다. 코넬대의 남학생과 여학생 비율은 4대 1이었다. 여성에게 할당된 얼마 되지 않는 자리를 두고 어마어마한 노력과 치열한 경쟁을 거쳐 입학한 여학생들은 당연히 또래 남학생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성실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이 속한 캠퍼스를 “남편감 찾기 좋은 곳”이라는 말로 깎아내렸다. 그 같은 주변화에 억눌려 여학생들은 스스로의 총명함을 숨기고, 능력을 감추어야 했다. 그 시절 대부분의 뛰어난 여성은 남성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 “어쩌다 한 번씩 나타나는 호기심의 대상”으로 취급받으며, 기이하고 특이한 존재 혹은 여성 전체를 대표하는 견본품으로 여겨지는 우울한 경험을 공유했다. 여성은 남성이 주류인 세계에서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마다 ‘이 곳은 네 자리가 아니라는 암시’를 끊임없이 받아야 했다. 루스도 그랬다. 코넬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로스쿨에 진학했을 때도, 컬럼비아대로 옮겼을 때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캠퍼스 내 여자화장실 위치를 외워야 했고, 도서관에도 마음껏 드나들 수 없었으며, 교지 편집진 파티도 즐길 수 없었다. 더 많은 여성에게 더 많은 자리와 더 큰 권력이 필요했다. 루스는 묵묵히 나아갔다.

“강의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만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성적이 안 좋으면 사람들이 이것을 ‘나’라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여자라서 못 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만 같았다.”
_RBG

“어떤 발언을 하고 나서 스스로 생각해도 썩 괜찮은 의견이구나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누군가 내 발언을 그대로 가져가서 말한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반응하기 시작한다. 나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수많은 모임에서 이런 일을 겪었다.”
_RBG


로스쿨 재학생과 졸업생은 로펌이나 법원의 재판연구원으로 일하며 사법 시스템의 생리를 익히고, 엘리트 코스로 진입하는 중요한 관문에 들어선다. 졸업 전부터 뛰어나기로 이미 유명했으며, 로스쿨을 공동 수석으로 졸업한 루스에게도 당연히 그런 미래가 약속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아이를 둔 엄마라서, 결혼한 여성이어서, 혹은 단지 ‘여성’이어서 곤란하다는 대답뿐이었다. 심지어는 ‘남학생 전용’이라는 라벨이 붙은 입사지원서도 수두룩했다. 럿거스대는 “여성이고” “남편이 많이 번다”는 이유로 그에게 더 낮은 강의료를 제안했다. 암 투병을 한 남편과 기적적으로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는, 임신 사실을 들켜 교수직에서 물러나야 할까 두려워 방학이 올 때까지 몸에 맞지도 않는 옷으로 한 학기를 버텼다. 이런 경험들 위에서 1972년, 긴즈버그는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에 여성권익증진단WRP을 공동 출범시켰다. 그곳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였던 수많은 여성을 만났다. 지역 내에서 테니스를 가장 잘 쳤지만 학교 대표팀에 들어갈 수 없었던 선수, 가족을 건강보험에 가입시킬 수 없었던 가장, 임신을 사유로 일터에서 내쫓긴 교사, 임신이 “도덕적?행정적 결격 사유”라는 이유로 강제 전역을 명받은 군인……. 이들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능력이 있어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었다. 긴즈버그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그는 이례적으로 성공한 한 명의 여성 개인에 머물러서는 안 되었다.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을 그려야 했다.

“남성들은 배우고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자기네 무리 한복판에 여성들이 등장해야만 한다. (…)
남성들에게는 폭넓은 인격적 특성을 다양하게 표출하는 여성들과 함께 일해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여성들과 직장 동료로 어울릴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_RBG


1993년, 긴즈버그는 백악관 로즈가든을 찾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여성운동의 영웅이자 법조계의 스타라고 소개하며 여성으로는 두 번째로 그를 연방대법원 대법관에 지명했다. “차별을 경험한 그는 향후 20년을 바쳐서 차별과 싸우고 우리의 아내, 어머니, 자매, 그리고 딸을 위해 이 나라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저 말은 반쪽짜리였다. 그는 ‘우리의 남편, 아버지, 형제, 그리고 아들’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남성이 주체가 된 몇몇 사건을 변호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남성의 수가 많았던 판사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성차별이 여성은 물론 남성에게도 해로움을 입증하고 납득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좋은 세계에 대한 희망은 여성과 남성 모두가 성역할로부터 해방되어야 기약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런 세계를 위해서는 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