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영화사 (1892년에서 1945년까지)

한국근대영화사 (1892년에서 1945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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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짧지만 뜨거웠던 시대의 영상, 최초의 한국근대영화 연대기
조선인이 만들어낸 근대의 가장 대표적인 장면을 담다!
ㆍ 탄생부터 존립까지,
근대 한국영화의 생존을 위한 분투기

1876년 개항과 함께 조선은 자본주의적 세계질서에 편입되어 근대사회로 빠르게 이행해갔다. 이 시기 유입되어 조선 문화의 획기적 변화를 주도한 문물 가운데 하나가 활동사진이다.『한국근대영화사』는 활동사진이 유입되고 1892년 인천에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인부좌(仁富座)가 설립된 시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는 1945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의 주요 장면과 사건, 인물, 영화운동, 영화이론, 작품, 관련 기록을 포괄적 ㆍ 종합적으로 기술한 책이다. 영화가 유입되면서 극장이 설립되고, 영화 제작 산업과 흥행업이 발달하였으며, 영화라는 근대적 대중문화가 조선에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이 시기 신생(新生) 조선의 ‘영화인’과 조선의 ‘관객’은 일본의 자본과 일본 영화산업의 지배하에 자기 땅에서 타자로 위치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한 열정과 ‘조선영화’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가까운 각고의 노력으로 생존 그 자체를 끊임없이 모색한다. 다양한 영화적 시도와 개인적 역량이 꽃을 피웠으며 영화판은 변화와 각축, 새로움과 열정의 문화 장(場)으로 뜨거운 한 시대를 앓는다. 불과 5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 겪은 왕조의 몰락과 식민기의 암울, 전쟁의 시련과 이념의 혼돈이 고스란히 이 시기 영화에 반영되어 있다. 역설적으로, 이렇듯 혼돈 속에서 급속도로 전개된 폭풍우 속 급류 같았던 당대 영화계의 역동적인 흐름이 오늘날 한국영화의 굳건한 토대가 된 것이다.
저자

이효인

중앙대학교첨단영상대학원에서영화사및영화이론으로박사학위를받았다.서울영화집단,민족영화연구소에서활동했으며서울독립영화제집행위원장,한국영상자료원원장을역임했다.현재경희대학교연극영화학과교수로재직중이다.「한국독립영화2세대의영화미학론」(『영화연구』,2018)등수십편의논문을발표하였고,주요저서로는『한국영화역사강의1』(이론과실천,1992),『한국근대영화의기원』(박이정,2017)등10여권이있다.

목차

책을내면서

1부1892-1925
영화유입과영화산업의형성(한상언)

1영화유입과극장설립
-극장과흥행업의탄생
-활동사진유입
-언어와문화차로이원화된서울의극장
2영화산업의형성
-활동사진상설관등장
-닛다연예부와하야카와연예부
-우미관과단성사
-활동사진시대의꽃,변사
3연쇄극과영화제작의시작
-연쇄극유입과제작
-일본인상설관의극영화제작
-조선총독부의영화활동
-경성일보사의영화제작
4극영화의시대
-극동영화구락부의〈국경〉
-동아문화협회와단성사촬영부
-조선키네마주식회사
-백남프로덕션과계림영화협회
-영화검열

2부1925-1935
영화,영화인,영화운동(이효인)

11920년대중반,조선영화장場의각축
-근대영화의출발,유랑하는이경손?변사감독김영환
-근대영화사의절반,나운규
-〈아리랑〉,통속성과외래성그리고민족성
-심훈과‘먼동이틀때’
-대중문화시장의각축,라디오매체의등장과경성방송국
-영화를찬양하는모임,찬영회
2조선영화의새로운시도
-조선영화예술협회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결성과해체
-근대영화의시도,카프KAPF영화
-주인규그룹과적색노조영화
-카프검거사건
31930년대초반,조선영화장場의변화
-근대영화의대중성,최독견?윤봉춘?이규환?안종화
-경향영화에서대중영화로

3부1935-1945
발성영화시기에서전시체제까지(정종화)

1발성영화라는모색
-토키의시도(들)
-경성촬영소의협업協業시스템
-조선영화인의분투,한양영화사
-일본영화촬영소유학파
-무성에서발성까지,조선영화의스타일
2조선영화제작지형의변화
-‘영화통제’라는역설적기회
-조선영화계의활기,‘조영’과‘고영’
-〈나그네/다비지〉그리고일본영화와의합작경향
-조선영화의이출移出과‘내지’일본의수용
3조선영화의전시체제
-조선영화령과영화신체제
-1940년대초반경성흥행계
-조선영화와내선일체內鮮一體
-문화영화:‘조선문화영화협회’와‘조선영화계발협회’
-최인규의〈수업료〉와〈집없는천사〉가말해주는것들
4국책영화라는장場
-조선영화의마지막모색
-‘조선영화’라는특수성
-식민지영화국책의산실,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임화의‘조선영화론’

*미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ㆍ2019년한국영화탄생100주년을맞아
‘한국근대영화’를새롭게명명하다

조선영화는서구근대와일본근대사이,그리고서구영화와일본영화사이에서만들어진식민지근대의산물이자기록이다.일제와일본영화산업과타협하고경합하며만들어낸조선영화의미장센속에조선근대의풍경이오롯이새겨져있는것이다.이책에서는‘한국근대영화’라는용어와그개념을최초로공식화했다.기술적으로는유럽에서발명되었고,할리우드를중심으로한미국에서자본주의적상품으로재탄생한영화는전적으로일본이라는국가체제와경제시스템속에서조선에유입되었다.비록조선영화의근대는식민지상황이라는한계속에서이루어졌으나그속에서일궈낸조선인,조선영화라는독보적인자의식은그시대가남긴영화와그들의영화적행보속에고스란히투영되어있다.저자들이일제강점시기의조선영화를‘한국근대영화’라고명명한이유는바로,조선영화가조선인이만들어낸근대의가장대표적인장면이라고생각했기때문이다.

1919년10월27일단성사에서는조선인이제작한최초의영화〈의리적구토〉(義理的仇討)가상영되었다.1963년한국영화인협회에서는이를한국영화의기점으로삼아이날을‘영화의날’로지정하였고,그로부터100년이흐른2019년은한국영화탄생100주년을맞이하는해이다.이책『한국근대영화사』는조각조각흩어져있던한국영화의다양한근대성논의를세명의저자가하나로엮어낸15년연구의결실이다.2000년대중반이후중국에서는9편의조선영화필름이차례로발굴되었고,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2014년까지일본잡지와매체속에남은조선영화기록을집대성했다.해당자료의발굴과연구가이책의저자들에의해주도되었으며,이에대한총체적고찰이근대영화에대한시각을전환하고영화사의누락된부분을채우며책의내용을풍부하게하는데결정적으로작용했다.그간출간된통사형식의한국영화사에서다루었던근대기영화에관한주요쟁점들의오류를바로잡고,새롭고합리적인시각으로쟁점과논의를재분석했다.한국근대영화를본질적으로이해하기위한주요주제들을엄밀한비교분석,확장된한일관계사연구등을통해보다치밀하게기술한,‘한국근대영화사’의첫다큐멘터리라고할수있다.

ㆍ영화상영장의진풍경,영화에열광했던조선인관객들

얼마전〈미스터션샤인〉이라는드라마가인기리에방영되었다.드라마의배경은20세기초경성.이시기조선지도를보면서대문에서종로통을중심으로원각사,우미관,단성사,광무대등조선인을위한극장이있었고,남대문과충무로,남산을잇는본정길에는일본인전용극장이늘어서있어극장은두민족의정신적거리만큼이나지역적으로이원화되어있었다.1903년『황성신문』에는‘한성전기회사기계창’에서동화10전을받고영화를상영한다는광고가실렸는데,새롭고진기한볼거리였을‘움직이는사진’을보러전기회사기계창고공간에모여든조선인들의호기심에찬모습을상상해볼수있다.극장이세워지던전후시기의영화상영모습을전해주는진풍경이다.

1935년조선최초의토키영화〈춘향전〉이제작되기전,조선에서는이미서구의토키영화가상영되고있었다.영어가일상화되지않았던시절관객들은동작에맞춰나오는소리가더없이진기했지만‘무슨뜻인지모르는지껄임’에이내피로감을느꼈고,〈춘향전〉의상영으로조선사람의말이스크린에서들리자이에열광했다.토키〈춘향전〉을보기위해극장은매일매야초만원을이뤘고이영화의성공은토키제작열기에불을붙였다.1940년대전시체제하에서도계발과선전을목적으로한지방순회상영회는계속되었는데,이와관련된조선총독부직원의다음기록에서영화속판타지의세계에빠져든조선관객들의모습을확인할수있다.“이동영사반이멀리떨어진벽지의촌락을방문하면2리3리나떨어진부락에서부터조선의많은아녀자들이아기를업고도시락을지참하여도보로오는데,추운겨울에도화기가적은(상영)회장에서마지막까지영화속으로빨려들어갈듯이열심히보고있다.영화가끝나고나서또도보로수리길을돌아가는데,이런장면을보면‘역시영화밖에없다!’는생각을절실히하게된다.”

ㆍ영화보다더영화같았던,‘조선영화’의풍경을엿보다

영화는대중의마음을움직이고사회를변화시키는힘이있다.자본주의적성격과오락성이핵심인예술이지만당시에는계몽과교화를위한다양한영화가제작되었다.조선에서제작된최초의위생계몽영화〈생의과〉(生の誇,1922)는위생관념이부족하여전염병에걸린여주인공이미모가망가져괴로워하다연인과함께자살한다는내용으로,극적줄거리를통해대중에게어필하고자했던일제의의도를엿볼수있다.일제의검열과제약으로상영이취소된영화도있다.최초의극영화인〈국경〉(1923)은일본제국주의침략을합리화하려는목적의영화로,일본국경수비대가마적단을토벌하는내용이었다.이마적단이만주에서활약하던우리무장독립군이었던까닭에개봉첫날조선인학생들의엄청난비난과야유를받았고,조선인을자극한다는이유로상영이금지되었다.1930년대후반일본어린이들은의무교육을받던시대,수업료를내지못해거리의부랑아로전락한조선인학생을조선의목사가구제한다는내용의〈수업료〉(1940)역시,제국의심기를건드려상영금지된다.

기록에의하면조선인에의해최초로영화가제작된것이1919년이라고하고그이전에도영화는제작되었을것이라추측되지만,안타깝게도필름으로남겨진가장오래된영화자료는1934에제작된〈청춘의십자로〉다.이영화를통하여조선무성영화의스타일과당시의영화문법을파악할수있을뿐아니라,영화속에서재현되는근대의풍경을그시대의눈으로살펴볼수있다.영화속에는서울이라는도시의풍경,유한층이누리는각종생활용품들,그리고기차와자동차의질주,골프치는모습등이그려졌는데,이런장면들은동시대관객들에게일종의희열감을주었을것이다.말로만들었지눈으로확인할수없었던근대적삶,그것이비록신기루같은것일지라도스크린은관객들에게충분할정도로시각적쾌락과영화적판타지를충족시켜주었을것이다.

ㆍ대중과함께울고웃었던,한국근대영화를빛낸별들

조선영화초창기의스타는뭐니뭐니해도‘활동사진시대의꽃’이라불리는변사들이었다.초창기변사들대부분은하급관리출신으로,활동사진이인기를끌면서변사라는새로운직종을개척했다.극장에서의역할이커지자,그들은요즘의연예인과같은인기를누렸다.조선인을위한상설관우미관의주임변사였던서상호는자전거클랙슨을이용한‘뿡뿡이춤’이라는개인기로큰인기를얻기도했다.그러나새로운인물들이등장하고토키시대가도래하면서변사들은지방으로밀려나거나역사속으로사라졌고,심지어자살을시도하기도했다.극장운영과영화제작에참여하거나극작가로변신하는등,새로운길을개척한변사들은이후영화계에서중요한역할을담당했다.

“〈아리랑〉을촬영할때에나자신은전신이열에끓어오르던것을기억합니다.…오직내정신과역량을다하여서…자랑할만한우리의조선정서를가득담아놓는동시에‘동무들아결코결코실망하지말자.’하는것을암시로라도표현하려애썼고…”근대영화의상징,조선영화의톱스타나운규가〈아리랑〉제작시기를회고하며쓴글이다.다양한시각에서의재평가에도불구하고,최초로자신의영화에민족정서를은유하고조선현실을반영함으로써대중의폭발적인호응을얻었다는점,이후만들어지는조선극영화에절대적인영향을미쳤다는점에서,나운규의영화세계는독보적가치를지닌다.

한국근대영화를연대기순으로살펴보면그속에는오늘의우리영화를있게한선구자들즉제작자와감독,촬영기사와녹음기사,극작가,이론가와사상가,배우와스텝등별처럼수많은스타들의이름이파노라마처럼펼쳐진다.그가운데특히우리의시선을이끄는것은만인의연인으로사랑받았던여배우들이다.1932년〈임자없는나룻배〉(이규환감독)로데뷔한문예봉은최초의토키영화이자흥행대작〈춘향전〉외에여러극영화에서여주인공을맡았고,그의인기와국민적영향력으로1940년대국책영화시기수많은선전영화에출연했다.첫영화〈심청〉(1937,안석영감독)으로대스타가된김신재는1980년대까지200편이넘는영화에출연했다.1948년북으로간문예봉은인민배우로생을마감했고,한국전쟁이후남편최인규감독이납북되어홀로남한에남겨진김신재는생활고를겪기도했다.단아한모습으로,또는귀엽게미소짓는얼굴로영화의스틸사진속에남겨진그들의모습과근대영화속활약상을책속에서만날수있다.

ㆍ1892∼1925영화유입에서극영화의시대까지
-조선인극장의설립과조선영화의탄생

1892년인천에는조선최초의극장이설립된다.1부에서는이시기부터,무성영화가제작되어영화제작의틀이갖추어지기시작하던1925년까지를다룬다.최초의조선영화는어떤조건속에서탄생했을까ㆍ이질문에대한해답은일제에의한조선영화산업의구조화와지배에있다.책에담긴초유의발굴자료와서술내용은제작과상영을포함한영화전반이정치경제적맥락에놓일수밖에없음을보여준다.19세기말개항장에들어선‘극장’은전근대유교문화아래돈을지불하고흥행물을거래하는문화가존재하지않던조선에서,자본주의적흥행문화를경험할수있는전혀새로운장소였다.1910년대한제국이일제의식민지로전락하게된뒤조선은손쉽게일본영화산업의소비지로구조화되었으며,자연적으로조선인은열린공간에서전통연희를즐기던구경꾼에서흥행물을소비하는근대적관객으로재탄생했다.

1910년을전후하여일본인자본의극장을중심으로일본인에의한영화가조선에서제작되기시작한다.단성사,광무대등에이어1912년에는조선인을위한활동사진관우미관이설립된다.우미관역시일본인업자에의해만들어졌으나그곳의영사기사,변사,악사,사무원등실무담당자를중심으로본격적인조선영화인이탄생한다.그리고1919년,일본영화사와특약을맺은조선인전용극장단성사에서조선인이제작한최초의영화〈의리적구토〉가상영된다.극영화제작이시작된1919년에이르러일본인흥행업자들은소수일본인대상에서관객수가많은조선인으로시선을돌렸고,1923년조선인관객을대상으로한극영화〈국경〉과조선의고전을소재로한〈춘향전〉(하야카와고슈감독)이제작됨으로써조선에서도극영화의시대가도래한다.1920년대초반윤백남,조일재등에의해만들어진조선인주도의영화회사는〈아리랑〉과같은보다근대적가치의영화탄생에인적ㆍ물적토양을제공하였다.

ㆍ1925∼1935나운규의〈아리랑〉부터〈청춘의십자로〉까지
-조선영화의각축,사상과예술의신물결
조선최초의영화〈의리적구토〉이후전래이야기나일본원작에기대어영화를만들었던조선영화계가자신만의이야기를가지게된것은나운규의〈아리랑〉(1926)에서였다.이로부터약10년후조선최초의토키(발성)영화〈춘향전〉(이명우,1935)이제작됐다.무성영화의전성기였던이10년은향후조선영화의방향을결정짓는다.2부는이시기를이끈조선영화인들과,영향력있는대중문화매체로새롭게등장한라디오방송,1920년대영화사에서가장중요한사건인카프영화운동을중심으로전개된다.더불어남아있는가장오래된조선영화필름이자조선무성영화의이정표라불리는〈청춘의십자로〉(안종화,1934)를통해,한계속에서나마조선무선영화의양식을가늠해본다.

조선영화제작초창기중심인물이었던이경손,변사출신으로영화계와대중음악계에서활약한김영환,조선영화의전설이된나운규,문예계의신흥인텔리를상징하는심훈등이시기를이끈주요인물들의미학적정체성과영화적환경,이들을중심으로모여들었던조선영화인들의활동은조선인의영화적활동이비교적주체적으로전개되면서새로운모색을꿈꾸었던당대의시대상을보여준다.이시기주목할만한영화활동은사회주의운동의맥락에서영화적신념을사회변혁으로이끌고자했던카프영화운동과적색노조운동이다.비록1931년전후의대대적인검거사건에의해좌절ㆍ해체되고말지만,이들의활동은현재까지도‘영화와사회’와의관계에대한질문으로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