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를잃어버렸던언어심리학자,
언어의탄생과소멸을기록하다
우리는날때부터모국어를지정받는다.한국에서태어났다면한국어가,미국에서태어났다면영어가모국어가되는식으로.이는선택의영역이아니다.더구나언제어떻게배웠는지도모르게모국어에유창해진다.어른이되어서제2외국어를배워본사람이라면알것이다.몰랐던언어를배우기는쉽지않다는것을.얄궂게도유창성은투자한시간과꼭비례하는것도아니라서,원어민처럼그말로생각하고꿈을꾸기까지는얼마간의타고난감각이필요한것도사실이다.하지만일단모국어가아닌다른언어를습득하고완전한‘이중언어사용자’가된이후에는어떨까.모국어와제2언어가자아를사이좋게나눠가질까?언어와자아는어떻게연결되어있을까?만약이중언어를사용한다면자아도두개로나뉘게될까?혹시,우리의머릿속에서두언어가주인공자리를두고다투는건아닐까?그러다더힘이센언어가더약한언어를밀어내고,그것도아주영영밀어내고,한가지언어로만말하게될수도있을까?
『이중언어의기쁨과슬픔』을쓴저자줄리세디비는언어심리학자다.체코슬로바키아에서태어나두살때까지그곳에머물다가,오스트리아와이탈리아를거쳐캐나다몬트리올로가족모두가이주했다.체코어,독일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영어.인간이가장극적으로변화하는유년기에이렇듯다채로운언어를온몸으로통과해낸저자는운명처럼언어심리학에이끌렸다.그중에서도체코어는그녀의모국어로서특별한의미를지닌다.캐나다에정착한이후‘주류언어’인영어를배우기시작하면서‘비주류언어’이자‘이민자의언어’인체코어는자연스레뒷전으로밀렸고,어느새기억저편으로사라져버렸다.체코어의죽음을애도하는일은그녀의아버지가고향땅에서숨을거둔후부터시작되었다.그녀가모국어로-비록몇가지단어를서툰발음으로드문드문말하는수준이었지만-대화를나누던유일한사람이었던아버지.그제야비로소저자는모국과자신을이어주던닻이진정풀리고말았음을체감한다.“아버지를애도하면서동시에나는앞으로의삶에서느낄체코어의침묵을슬퍼했다.내게는오직체코어로만말할수있는부분,영어로는형제자매나어머니에게도표현하기힘든어떤부분이있음을깨달았다.갑자기나는허공에뜬기분이들었다.내어린시절뿐아니라나를형성한문화전체에서닻이풀린느낌이었다.”(12)
이책은그리하여모국어상실의메커니즘과언어간의권력관계를탐구하는,동시에수없이스러져간소수민족들의‘약한언어’위로수북이쌓인먼지를털어내는,애도일기에다름아니다.
“언어상실의중심에는잔인한역설이있다.한언어의약화는종종더나은삶─풍요,안전,주류문화로의진출─을향한꿈으로인해야기된다.지금까지살아있는수천개의언어중단지몇가지만이사회에서대접받는위치와특권을누린다.세력이약한언어사용자들은자신들의생활과정신에서이들우세한언어에자리를양보하는데,실제로는더나은삶과자신의정체성을맞바꾸는것과다름없다.”(13)
그리고“우세한언어”는대개영어다.많은사람들이모국어와영어를둘다쓰는이중언어사용자로살아간다.그리고영어를배우는시기가이르면이를수록,모국어는더욱쉽고편리하게지워진다.이과정에서개인의자아는미묘하게분리된다.
“줄리세디비는언어의탄생과죽음,부활을기록하는필경사이다.
그녀가꿈꾸는다성사회는카오스다.
가장아름다운카오스.”
-김주혜,『작은땅의야수들』저자
사라지는모국어의대부분은“세력이약한언어”이다.에야크어,쇼쇼니어,블랙풋어,미치프어…….세상에는너무나다양한언어가있고,우리는아마지구상모든언어가어떤소리를내는지미처다들어보지못한채죽을지도모른다.각각의언어에는그언어를사용하는사람들고유의정서와역사,문화,통념이깃들어있다.예를들어트와치어는“마른버드나무호수”“검은흙연못”“진들딸기호수끝썰매길종착지”“작은물고기들의호수”를뜻하는단어들을가지고있다.트와치어사용자들은대부분수로위로배를타고다니며생활하기때문에,직관적으로알아챌수있는지리와풍광을묘사하는것이그들삶에중대한일이었기때문이다.또다른예로,이이스카어사용자들은예로부터그지역의계절리듬에맞춰동물이나타나고사라지는시기,사냥에적합한시기등을구분지어왔다.그래서“검독수리달”“거위달”“사슴발정기달”같은절기가존재한다.흔히말하길,한국어사용자가자주쓰는단어인“정(情)”“한(恨)”등의단어는외국어로옮기기힘들다.그단어들안에어쩌면한국인이라면모두어렴풋하게나마공유하는고유의정서가서려있기때문일것이다.저자는이렇듯각언어가가지는무구한역사가얼마나중요하고또그자체로아름다운지노래한다.그리고다양한언어가공존하는사회를다성음악에비유하며,“다성(多聲)사회”(173)를이루어야한다고주장한다.
그러나다성사회를부정적으로,심지어는위협적으로바라보는사람들도있다.어느날저자는캘거리중앙도서관에서일을하던중,도서관직원이어떤남자에게가서음악소리를조금줄여달라고요청하는모습을보게된다.그남자는이렇게대꾸한다.“왜내가소리를줄여야하죠?나는여기이사람들이온갖나라말로지껄여대는소리를듣지않으려고음악을트는것뿐이에요.저사람들한테가서그들의언어를줄여달라고하지그래요?”(169)보수적인이민규제정책을지지하는미국인은,길거리에서들려오는스페인어를불편해하고심지어두려움을느낀다.한국인이길거리에서들려오는소수언어를낯설어하고그불편한감정을사용자에게까지전이시키는것도마찬가지현상이다.하지만저자가인용하는한연구결과에따르면,“이불신은이웃과거의또는전혀이야기를하지않는사람들사이에서만팽배했고,이웃과잘어울리는사람들은그런주저함을보이지않았다.”(207)단순히다른언어사용자를‘보는것’만으로도다양성에대한불신이줄어든다는뜻이다.그리고이유없는불신을사그라트리기위해서는공동체적노력이필요하다.
“사람들이자신의여러모습중하나를선택하도록우리가강요하지않을수있을까?사람들이가진가족,커뮤니티,언어와의끈을지지하면서주류사회에서차단되지않도록할수있을까?그들의언어를단지유용한경제적자산이아닌,자기가누구인지를구성하는대체불가능한측면으로구축할수있을까?두개의마음을가진사람들,서로다른세계의번역자들,중간자들,두가지언어로기억하고삶을사는사람들,충성심이하나이상의집단에고루퍼져있는사람들을위해우리가정말공간을마련할수있을까?우리가할수있다면,다양성에따르는최악의위험은피하면서다양성이제공하는풍성한것들을얼마간수확할수있을것이다.”(209)
언어가기억되고사라지는방식을추적하는
언어심리학자의끈질긴시선,
당신의모국어는안녕한가요?
아버지를잃고몇년후,저자는체코를찾는다.오랜세월고향땅에서터전을짓고대를이어온친지를만나고,그들의문화와언어를‘단기여행자’로서가아닌당사자로서바라본다.도착한직후그녀의체코어는“누더기”(227)같았지만,한달이흐르자잊고있었다고생각했던체코어단어가불쑥불쑥일상생활에들어오기시작했다.낯선사람과대화를나눌때잠깐동안은원어민이라고여겨지기도했다.
“체코어를다시배우는것이내게는예상하지못했던언어적초능력의발견처럼느껴졌다.생각에형태를입히기위해입을열었고,자주적절한문장이흘러나와스스로도놀랐다.마치생각만으로방저쪽에있는책을옮길수있는능력을발견한기분이었다.내표현력이새로생기는근육처럼잔물결을일으켰다.내가잊었다고믿었던언어의많은부분이사실잊힌게아니었고,많은부분이단지다른언어들의먼지와파편밑에오래묻혀있었을뿐이었다.”(230)
이경험에고무된저자는더이상사용하지않는어릴적의모국어를성인이되어다시학습하는사람들에대한연구를찾아보기시작한다.그리고결국어떤언어를‘잊는다’는것이그렇게쉽지않다는것을깨닫는다.우리의기억은생각보다깊고심오해서,본능적으로체화한언어를쉽게포기해버리지않는다는것이다.한편기억저편의무의식이언어능력을좌우하기도한다.예를들어나치시기독일에살던유대인의경우,안전한나라로도피하기전에독일에서더오래산사람들이더짧게산사람들보다독일어를더많이잃어버렸다.독일에오래머물렀을수록그만큼더오래독일어를사용했을테니이는아이러니처럼느껴진다.연구자에따르면,이들은그만큼나치의탄압과폭력행위를더직접적으로경험했으며,이상황에더오래노출된사람의무의식에는독일어에대한부정적감각이덧입혀졌다고한다.그래서한때자신의모국어였던독일어를자연스레소멸시키고,제2언어만사용하게된것이다.
이외에도저자는언어심리에관한다양한질문에답한다.왜성인은어린아이보다외국어학습에더딘가?그래서,이중언어에도장점이있는가?모국어를재학습하는효과적인방법이있는가?다성사회를일구려면어떤노력을해야하는가?이를설명하기위해저자가가져오는사례들은무척흥미롭다.그러나이책의가장큰장점은,언뜻딱딱하게느껴질수있는언어심리의기제를에세이스트의목소리로일상의언어를사용하여풀어낸다는것이다.독자는모국어에서떠나방황하다가결국그것을되찾고평온에이르는저자의여정을따라걷게될것이다.그래서책은크게죽음-꿈-이중성-갈등-회복-고향으로구성되며,각부에서그와관련한저자의이야기및세계각지의사례와연구결과를만나게된다.그리고마지막페이지를덮었을때,기척도없이늘우리곁에있었던모국어의소중함을다시금깨닫게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