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주의와 타자 ("누구를 위한 헌법인가?")

헌정주의와 타자 ("누구를 위한 헌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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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 책은 다른 지면에 소개되었던 저자의 연구 논문들을 보완ㆍ수정ㆍ가필한 글들로 구성되었다. 원래의 논문에서 많은 부분을 손봤으나, 집필 당시의 상황이나 분위기를 지켜야 할 경우에는 그대로 두었다. 글들이 발표되거나 수록된 지면은 아래와 같다.

1장 『법과 사회』 제20호, 2001, 법과사회이론학회
2장 『법철학연구』 제6권 제2호, 2003, 한국법철학회
3장 『법과 사회』 제36호, 2009, 법과사회이론학회
4장 『법과 사회』 제51호, 2016, 법과사회이론학회
5장 『법학연구』 제49집, 2016, 전북대학교 법학연구소
6장 『법철학연구』 제15권 제2호, 2012, 한국법철학회
7장 『법과 사회』 제45호, 2013, 법과사회이론학회
8장 『헌법학연구』 제14권 제3호, 2008, 한국헌법학회
9장 『상생을 위한 경제민주화』(나남) 2부 2장, 2013, 한국사회학회
10장 『법학연구』 제53권 제2호(통권 제72호), 2012, 부산대학교 법학연구소

* 6장과 7장의 일부는 이국운(2017)에, 10장은 김선욱 외(2013)에 약간씩 변형된 형태로 활용되었다.
저자

이국운

1966년대전출생으로
서울대학교법과대학을졸업하고동대학원에서법학박사학위를받았다.
1999년부터경북포항의한동대학교법학부에서헌법과법사회학등을가르치면서,
헌법이론,법률가정치,기독교정치사상분야를연구하고있다.
주로사법개혁과자치분권분야에서헌법적실천에앞장서왔으며,
타자윤리와헌정주의에입각한시민헌법교육에도남다른관심을기울여왔다.
주요저서로〈헌법〉,〈법률가의탄생-사법불신의기원을찾아서〉,〈헌법의주어는무엇인가〉등이있고,스티븐브라이어의〈역동적자유〉(공역)와마이클왈저의〈출애굽과혁명〉을번역했으며,100여편에이르는연구논문을출간했다.
사법시험등각종국가고시의시험위원을역임했고,
2015년한국헌법학회가수행한〈지방분권형헌법개정안연구〉의연구책임자이기도했다.

목차

緖:누구를위한헌법인가?_005

1부
1장공화주의헌법이론의구상_025
2장현대헌법이론에서‘타자’의복권_049
3장법과‘이웃’:법치의본원적관계형식에관한탐색_075
4장‘헌정적인것’의개념_103
5장헌법학방법론연구:해석학에서현상학으로_127

2부
6장민주공화국의탈권력적정당화_155
7장대한민국헌법제1조의한해석_181
8장직접행동민주주의와헌정수호_207
9장경제헌법과경제민주화_231
10장민주적연방주의와평화_257

追記:헌법이론공부길회상_283

출판사 서평

[머리말]
緖:누구를위한헌법인가?

전임교수로서헌법을강의한이래,나는줄곧조금색다른방식으로강의를시작하는전통을스스로지켜오고있다.첫강의시간에고등학교졸업생티를갓벗은학부2학년들의초롱초롱한눈망울들앞에나서서,나는대뜸헌법의본질을생각해보기위한집단실험을하겠다고선언한다.그러고나서자못엄숙한목소리로다음과같이외치는것이다.

“지금부터한시간동안여러분의국적을박탈한다!”

그리곤나는아무말없이교단을내려와교실구석을서성인다.그런내게,약간은허탈하고약간은웃음기가섞인학생들의눈길들이곧이어쏟아진다.한동안어색한분위기가이어지고,참다못한몇몇학생들이내선언의교육적의미를캐기위해몇가지수줍은질문을던진다.외면하던나는귀찮다는듯이한마디를덧붙인다.

“글쎄,그러니까이강의실은지금부터한시간동안무국적자들의해방구인셈이다!”

대개군대를다녀온늙수그레한학생들로부터비로소이집단실험의목적을알겠다는미소가포착되기시작한다.해마다반복되는헌법강의의개시의례니까그친구들중몇몇은이미사태의전말을전해들었음직도하다.하지만대부분의2학년짜리들은여전히어안이벙벙할따름이다.계속해서기다려도아무런움직임이없으면,어쩔수없이내가다시개입해야한다.

“좋아,자네들좋아하는‘상황설정’을내가해주지.자,이해방구에갑자기원인을알수없는전염병이돌기시작했다.그리고거기자네,맨뒷줄에서세번째안경낀여학생,자네가그주위의어떤작자에의해성추행을당했다.이정도면됐나?”

가지가지‘상황설정’이일반화된온라인게임덕인지,이때쯤되면이상한헌법교수가주도하는집단실험의의도가홉스니로크니하는이름들과함께기억되는소위‘자연상태’를재연하는데있다는것을알아채는학생들이있게마련이다.지금까지의경험으로보아이재간꾼들이배역을찾아내려고나서는수준까지집단실험이진척되는데걸리는시간은약25분정도다.

“여러분!우리가이대로가만히있을수는없습니다.뭔가조치를좀취해야되지않겠습니까?특히전염병은이대로두면위험하니까요.”
“그럽시다!”
“자.그러면먼저우리가운데로걸상을돌려마주보고앉읍시다.그리고함께뭔가를정해봅시다.”
“아니잠깐만,그런데당신은무슨권한으로우리더러돌아앉으라는거죠?”
“아니….제가언제명령했습니까?그냥제안했을뿐인데요?”
“아.그러지들말고….여러분!그러면혼란을없애기위해일단사회자부터정합시다.누구자원(自願)하실분?”

역할놀이를좋아하는세대적특성때문인지,이시점부터는굳이내가개입하지않아도학생들스스로놀라운즉흥성을발휘하기시작한다.몇해전엔교실한가운데벽을쌓아전염병을차단한뒤경찰을뽑아용의자를체포하기도했고,그보다더오래전엔스스로독재자를자처하며나선한남학생을다른학생들이쿠데타를일으켜연금하기도했다.학생들이히죽거리며집단실험의진지성을축내기시작할때쯤이면,어느새약속한한시간이훌쩍넘어있다.이제는다시내가개입해서끝내야할시점이다.

“타임오버!타임오버!이제실험은끝났다.여러분의국적을회복시킨다.숙제가두가지있다.첫째는오늘수업에서배운것이무엇인가를각자생각해오는것이다.헌법교과서에헌법의개념이나사회계약운운하는부분을찾아읽으면도움이될것이다.둘째는다음시간에토론할내용을각자생각해오는것이다.다들알다시피우리가배워야할대한민국헌법은1948년7월에만들어졌고,가장최근의헌법개정은1987년에이루어졌다.지금이강의실에있는사람들가운데1948년도에세상에있었던사람은아무도없고,1987년의헌법개정국민투표에참가했던사람은단한사람,나밖에없다.자네들은아마부모님들의계획속에나있었겠지.그렇다면자네들은지금한번도스스로동의한바없는대한민국헌법을자기의헌법이라고전제하고,그헌법을배우겠다고이수업에참여하고있는셈이다.동의한적도없으면서,왜이대한민국헌법이자네들의헌법이라는건가?도대체어떤이유로이헌법이여러분을구속할수있다는건가?이질문에관하여각자의진지한답변을만들어오는것이오늘의두번째숙제다.헌법교과서에헌법의효력운운하는부분을찾아읽으면혹도움이될지모르겠다.오늘수업은여기까지다.그럼.”

물론이런실험적방식은헌법강의의시작으로서이용될뿐이다.그다음시간의토론을거치고나면,나는다시전통적인헌법강의의궤도로쓸쓸히패퇴한다.물론그렇다고해서35년전내가들었던헌법강의들처럼헌법교수혼자앞에서서마이크를들고자신의교과서를죽읽어내려가는소위포어레중(vorlesung)을할수있는것은아니다.나는교과서를쓸생각도없고,포어레중은왠지죽은지식을전달하는것같아결코하게될것같지않기때문이다.이래저래선택할수있는것은기존교과서내용을대요를잡아설명해주고거기에덧붙여내나름의이해를첨부하는방식뿐이다.하지만이둘사이에서균형을잡는것은언제나지독히어렵다.어떤날은교과서의개념설명만하다가시간이부족해서끝내기도하고,다른날은내이론을펼치는데신명을내다가진도를놓치기도한다.그러다가한번씩나를절망케하는일이눈앞에서벌어진다.맨앞줄에앉아열심히강의를받아적는학생의노트가고시촌의유명헌법강사가편집한‘단권화헌법강의-이론과판례의완전정복’쯤되는책이라는사실을목격하게되는것이다.결국내헌법강의는그수험교재의구석에작은글씨로처박히는신세가되고만다.요사이법학전문대학원에서는헌법교수들이변호사자격시험에대비하여객관식문제풀이까지한다는이야기를자주듣는다.그래도그만큼은시달리지않으니나는아직덜불행한걸까?

내가헌법강의의첫시간을특이하기짝이없는집단실험으로시작하는까닭은한국사회의헌법강의가헌법의내용이나본질과너무도다르다고생각하기때문이다.헌법문서는온통자유와평등과인간으로서의존엄과행복추구의권리를함께외치는우리대한국민들의발화(發話)로가득차있다.이는일방적인선언이아니라대한국민들이서로에대하여헌법을고백하는것과같은감동적인모습이다.그러나정작그헌법을가르치는헌법강의는정반대로진행된다.헌법교수만말하고학생들은받아적기에바쁘다.얼마뒤에헌법교수는말한내용을시험문제로낼것이고,학생들은받아적은내용을답으로적어낼것이다.헌법교수는채점을하고,학생들은점수를받고,누군가는합격하고누군가는낙방할것이다.수험법학의숙명이란원래그런것이아니겠는가?
그러나조금이라도진지하게헌법문서를읽어본사람들에겐이러한광경처럼고약한모습이없다.어떻게헌법문서가선언하는대한국민들사이의자유와평등이한쪽만말하고다른쪽은듣기만하는지시와복종의일방적인형식속에담길수있단말인가?도대체지시와복종의형식속에서자유와평등이가르쳐질수있기는한것인가?자유와평등을지시와복종으로탈바꿈시키는헌법강의속에서과연우리는우리대한국민들의정치적상호고백인헌법문서를정당화할수있을까?수험법학의숙명을변명거리로내세울수있음을모르지않는다.그러나나는,적어도내게배우는학생들에게만은,수험법학의콘텍스트와별개로,헌법문서가실제로말하고있는바가통상적인헌법강의의방식에내포된것과는정반대에가깝다는점을반드시말해주고싶었다.그때문에나는매년고집스럽게이희한한집단실험을헌법강의의개시의례로시도해왔던것이다.

나는지금도,서울대학교법과대학1학년때의어느가을날,한창헌법강의가진행되던15동201호대형강의실의풍경을똑똑히기억하고있다.무료하게자신의헌법교과서를읽어가는유명한헌법교수님의모습이조그만플라스틱자를헌법교과서에대고열심히줄을쳐가며저자직강을따라외우던친구들의뒷모습에겹쳐져서시간이지날수록흐릿해지던그풍경말이다.그학기가시작할때,나는오랜습관대로강의실맨앞줄에앉아헌법강의의처음에등장하는헌법이니국가니주권이니하는개념들이어떻게정의되고또정당화되는지를한껏기대하고있었다.하지만얼마지나지않아나는유명한헌법교수님의포어레중은도무지그런문제들에관심이없으며,중요한개념들의설명은단지수험에필요한수준에서별다른논증없이툭툭던져지기만할뿐임을알게되었다.강의가진행될수록알수없는실망감에휩싸인나는점점뒷줄로이동했고,결국헌법교수님과친구들을한눈에관찰할수있는시야를확보한뒤혼자만의자문(自問)에빠졌었다.도대체우리는왜이렇게헌법을가르치고또배우는것일까?과연이것은헌법강의의올바른방식일까?
돌이켜보면,헌정주의라는단어는입헌주의라는이름으로35년전내가들었던헌법강의의첫부분에도어김없이등장했었다.예를들어입헌주의를“국민의자유와권리를헌법에선언해두고자유와권리가국가권력에의하여침해당하지않고보호되도록국가권력의근거와행사에관한규범을헌법에규정해둠으로써국가권력작용이헌법에구속되도록하는통치원리”로규정하는방식이다(김철수).하지만이개념정의를처음들었을때부터나는왠지그것이무의미한동어반복에머무르고있다는느낌을강하게받았다.왜냐하면그곳에는왜그것이입헌주의의정의(definition)인지를정당화하려는논증은제시되지않은채,단지입헌주의를그렇게정의하기로정한다는선언만이드러나있었기때문이다.나는불만에차서자문해야만했다.만약입헌주의가그처럼‘조작적정의’에불과한것이라면,도대체왜우리는그개념을주입하고,외우고,답안으로써내고,또채점을해서줄을세우고,결국에는그점수에따라합격과불합격을정해야하는것일까?
헌법교수님의포어레중이계속되면서나는헌법교과서의헌정주의가은연중서구적모더니티를전제하고있음을알게되었다.사실35년이지난지금까지도대한민국의헌법교과서들은대부분영국과미국과독일과프랑스헌정사를마치우리가마땅히따라야할역사적선례인듯소개하고있다.물론헌법강의에서근대서구의선진국들이겪은헌정주의의경험을무시하거나폄훼할이유는전혀없을것이다.하지만헌정주의가서구적모더니티를넘어서는보편적인가치를지니고있다면,당연히서구적모더니티바깥의세상에까지통용될수있는보편적인근거를함께제시해야만하지않을까?그러나아무리기다려도헌법강의에서헌정주의의보편성에관한논증은등장하지않았다.그렇다면이와같은근본적인논증의공백을어떻게메워야할것인가?헌법강의실의뒷줄에앉아나는누구도답해주지않는이질문앞에서방황할수밖에없었다.
남들이하지않는고민에자신을내어맡긴탓이었을까?나는학부2학년2학기때부터실정법학을벗어나비판법학의길에자발적으로들어섰고,결국그총아인법사회학을전공했으며,십여년의노력끝에법률가정치론으로법학박사학위를받았다.하지만법학박사가될때까지도학부1학년가을부터괴롭혀온‘도대체헌법이란무엇인가?’라는질문은도무지나를놓아주지않았다.게다가전임교수가되어헌법강의를시작하면서부터는사정이더욱심각해졌다.무엇보다자유민주주의체제속에서당위를전제한법적실천을시도하려면,이질문을회피할수없음이명백해졌기때문이다.학생들앞에서헌법을강의하고정치사회적으로도헌법에입각한발언과행동을시도할때마다,헌법학자로서내양심의한쪽구석에는‘도대체헌법이란무엇인가?’라는질문에답해야한다는부담감이자리하고있었다.

전임교수가되어헌법강의를시작한이후20년동안나는이질문에대하여답하기위해나름대로무진애를써왔다.초기에나는법사회학적문제의식의연장선상에서현시기헌정주의의타락한모습을자유주의적법치주의(liberallegalism)로규정하고,이에대한대안으로서공화주의헌법이론(republicanconstitutionalism)가능성에천착하기도했다.하지만곧바로공화주의만으로는궁극적인당위의문제를해명하지못한다는자책에시달리면서,헌법이론적방황을계속할수밖에없었다.그러다가아주우연한기회에나는엠마누엘레비나스의타자윤리를읽으면서,헌정주의의보편성을논증할만한나름의실마리를붙잡을수있었다.동일자의세계바깥에,그것을가능케하는‘그저있음’으로서,끊임없이‘나를죽이지마세요.’라고호소하는타자의얼굴이선재(先在)하며,인간의윤리는바로그와같은타자의정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