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주의와 타자 ("누구를 위한 헌법인가?")

헌정주의와 타자 ("누구를 위한 헌법인가?")

$18.46
Description
이 책은 다른 지면에 소개되었던 저자의 연구 논문들을 보완ㆍ수정ㆍ가필한 글들로 구성되었다. 원래의 논문에서 많은 부분을 손봤으나, 집필 당시의 상황이나 분위기를 지켜야 할 경우에는 그대로 두었다. 글들이 발표되거나 수록된 지면은 아래와 같다.

1장 『법과 사회』 제20호, 2001, 법과사회이론학회
2장 『법철학연구』 제6권 제2호, 2003, 한국법철학회
3장 『법과 사회』 제36호, 2009, 법과사회이론학회
4장 『법과 사회』 제51호, 2016, 법과사회이론학회
5장 『법학연구』 제49집, 2016, 전북대학교 법학연구소
6장 『법철학연구』 제15권 제2호, 2012, 한국법철학회
7장 『법과 사회』 제45호, 2013, 법과사회이론학회
8장 『헌법학연구』 제14권 제3호, 2008, 한국헌법학회
9장 『상생을 위한 경제민주화』(나남) 2부 2장, 2013, 한국사회학회
10장 『법학연구』 제53권 제2호(통권 제72호), 2012, 부산대학교 법학연구소

* 6장과 7장의 일부는 이국운(2017)에, 10장은 김선욱 외(2013)에 약간씩 변형된 형태로 활용되었다.
저자

이국운

1966년 대전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9년부터 경북 포항의 한동대학교 법학부에서 헌법과 법사회학 등을 가르치면서,
헌법이론, 법률가정치, 기독교 정치사상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주로 사법개혁과 자치분권 분야에서 헌법적 실천에 앞장서 왔으며,
타자 윤리와 헌정주의에 입각한 시민 헌법 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왔다.
주요 저서로 〈헌법〉, 〈법률가의 탄생-사법불신의 기원을 찾아서〉, 〈헌법의 주어는 무엇인가〉 등이 있고, 스티븐 브라이어의 〈역동적 자유〉(공역)와 마이클 왈저의 〈출애굽과 혁명〉을 번역했으며, 100여 편에 이르는 연구 논문을 출간했다.
사법시험 등 각종 국가고시의 시험위원을 역임했고,
2015년 한국헌법학회가 수행한 〈지방분권형 헌법개정안 연구〉의 연구책임자이기도 했다.

목차

緖: 누구를 위한 헌법인가? _005

1부
1장 공화주의 헌법이론의 구상 _025
2장 현대 헌법이론에서 ‘타자’의 복권 _049
3장 법과 ‘이웃’: 법치의 본원적 관계형식에 관한 탐색 _075
4장 ‘헌정적인 것’의 개념 _103
5장 헌법학 방법론 연구: 해석학에서 현상학으로 _127

2부
6장 민주공화국의 탈권력적 정당화 _155
7장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한 해석 _181
8장 직접행동민주주의와 헌정수호 _207
9장 경제 헌법과 경제 민주화 _231
10장 민주적 연방주의와 평화 _257

追記: 헌법이론 공부길 회상 _283

출판사 서평

[머리말]
緖: 누구를 위한 헌법인가?

전임 교수로서 헌법을 강의한 이래, 나는 줄곧 조금 색다른 방식으로 강의를 시작하는 전통을 스스로 지켜 오고 있다. 첫 강의시간에 고등학교 졸업생 티를 갓 벗은 학부 2학년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들 앞에 나서서, 나는 대뜸 헌법의 본질을 생각해 보기 위한 집단 실험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고 나서 자못 엄숙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외치는 것이다.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여러분의 국적을 박탈한다!”

그리곤 나는 아무 말 없이 교단을 내려와 교실 구석을 서성인다. 그런 내게, 약간은 허탈하고 약간은 웃음기가 섞인 학생들의 눈길들이 곧이어 쏟아진다. 한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참다못한 몇몇 학생들이 내 선언의 교육적 의미를 캐기 위해 몇 가지 수줍은 질문을 던진다. 외면하던 나는 귀찮다는 듯이 한 마디를 덧붙인다.

“글쎄, 그러니까 이 강의실은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무국적자들의 해방구인 셈이다!”

대개 군대를 다녀온 늙수그레한 학생들로부터 비로소 이 집단 실험의 목적을 알겠다는 미소가 포착되기 시작한다. 해마다 반복되는 헌법 강의의 개시의례니까 그 친구들 중 몇몇은 이미 사태의 전말을 전해 들었음직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2학년짜리들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계속해서 기다려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내가 다시 개입해야 한다.

“좋아, 자네들 좋아하는 ‘상황 설정’을 내가 해 주지. 자, 이 해방구에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 자네, 맨 뒷줄에서 세 번째 안경 낀 여학생, 자네가 그 주위의 어떤 작자에 의해 성추행을 당했다. 이 정도면 됐나?”

가지가지 ‘상황 설정’이 일반화된 온라인 게임 덕인지, 이때쯤 되면 이상한 헌법 교수가 주도하는 집단 실험의 의도가 홉스니 로크니 하는 이름들과 함께 기억되는 소위 ‘자연 상태’를 재연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학생들이 있게 마련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이 재간꾼들이 배역을 찾아내려고 나서는 수준까지 집단 실험이 진척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25분 정도다.

“여러분! 우리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뭔가 조치를 좀 취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특히 전염병은 이대로 두면 위험하니까요.”
“그럽시다!”
“자. 그러면 먼저 우리 가운데로 걸상을 돌려 마주보고 앉읍시다. 그리고 함께 뭔가를 정해봅시다.”
“아니 잠깐만, 그런데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우리더러 돌아앉으라는 거죠?”
“아니…. 제가 언제 명령했습니까? 그냥 제안했을 뿐인데요?”
“아. 그러지들 말고…. 여러분! 그러면 혼란을 없애기 위해 일단 사회자부터 정합시다. 누구 자원(自願)하실 분?”

역할 놀이를 좋아하는 세대적 특성 때문인지, 이 시점부터는 굳이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학생들 스스로 놀라운 즉흥성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몇 해 전엔 교실 한 가운데 벽을 쌓아 전염병을 차단한 뒤 경찰을 뽑아 용의자를 체포하기도 했고, 그보다 더 오래전엔 스스로 독재자를 자처하며 나선 한 남학생을 다른 학생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연금하기도 했다. 학생들이 히죽거리며 집단 실험의 진지성을 축내기 시작할 때쯤이면, 어느새 약속한 한 시간이 훌쩍 넘어 있다. 이제는 다시 내가 개입해서 끝내야 할 시점이다.

“타임 오버! 타임 오버! 이제 실험은 끝났다. 여러분의 국적을 회복시킨다. 숙제가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오늘 수업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가를 각자 생각해 오는 것이다. 헌법 교과서에 헌법의 개념이나 사회계약 운운하는 부분을 찾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는 다음 시간에 토론할 내용을 각자 생각해 오는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가 배워야 할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7월에 만들어졌고, 가장 최근의 헌법 개정은 1987년에 이루어졌다. 지금 이 강의실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1948년도에 세상에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고, 1987년의 헌법 개정 국민투표에 참가했던 사람은 단 한 사람, 나밖에 없다. 자네들은 아마 부모님들의 계획 속에나 있었겠지. 그렇다면 자네들은 지금 한 번도 스스로 동의한 바 없는 대한민국 헌법을 자기의 헌법이라고 전제하고, 그 헌법을 배우겠다고 이 수업에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동의한 적도 없으면서, 왜 이 대한민국 헌법이 자네들의 헌법이라는 건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 헌법이 여러분을 구속할 수 있다는 건가? 이 질문에 관하여 각자의 진지한 답변을 만들어 오는 것이 오늘의 두 번째 숙제다. 헌법 교과서에 헌법의 효력 운운하는 부분을 찾아 읽으면 혹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그럼.”

물론 이런 실험적 방식은 헌법 강의의 시작으로서 이용될 뿐이다. 그 다음 시간의 토론을 거치고 나면, 나는 다시 전통적인 헌법 강의의 궤도로 쓸쓸히 패퇴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35년 전 내가 들었던 헌법 강의들처럼 헌법 교수 혼자 앞에 서서 마이크를 들고 자신의 교과서를 죽 읽어 내려가는 소위 포어레중(vorlesung)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교과서를 쓸 생각도 없고, 포어레중은 왠지 죽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 같아 결코 하게 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기존 교과서 내용을 대요를 잡아 설명해 주고 거기에 덧붙여 내 나름의 이해를 첨부하는 방식뿐이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언제나 지독히 어렵다. 어떤 날은 교과서의 개념 설명만 하다가 시간이 부족해서 끝내기도 하고, 다른 날은 내 이론을 펼치는데 신명을 내다가 진도를 놓치기도 한다. 그러다가 한 번씩 나를 절망케 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다. 맨 앞줄에 앉아 열심히 강의를 받아 적는 학생의 노트가 고시촌의 유명 헌법 강사가 편집한 ‘단권화 헌법 강의-이론과 판례의 완전정복’ 쯤 되는 책이라는 사실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내 헌법 강의는 그 수험 교재의 구석에 작은 글씨로 처박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요사이 법학전문대학원에서는 헌법 교수들이 변호사자격시험에 대비하여 객관식 문제 풀이까지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래도 그만큼은 시달리지 않으니 나는 아직 덜 불행한 걸까?

내가 헌법 강의의 첫 시간을 특이하기 짝이 없는 집단 실험으로 시작하는 까닭은 한국 사회의 헌법 강의가 헌법의 내용이나 본질과 너무도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헌법 문서는 온통 자유와 평등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행복추구의 권리를 함께 외치는 우리 대한국민들의 발화(發話)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일방적인 선언이 아니라 대한국민들이 서로에 대하여 헌법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감동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정작 그 헌법을 가르치는 헌법 강의는 정반대로 진행된다. 헌법 교수만 말하고 학생들은 받아 적기에 바쁘다. 얼마 뒤에 헌법 교수는 말한 내용을 시험 문제로 낼 것이고, 학생들은 받아 적은 내용을 답으로 적어낼 것이다. 헌법 교수는 채점을 하고, 학생들은 점수를 받고, 누군가는 합격하고 누군가는 낙방할 것이다. 수험 법학의 숙명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헌법 문서를 읽어 본 사람들에겐 이러한 광경처럼 고약한 모습이 없다. 어떻게 헌법 문서가 선언하는 대한국민들 사이의 자유와 평등이 한 쪽만 말하고 다른 쪽은 듣기만 하는 지시와 복종의 일방적인 형식 속에 담길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지시와 복종의 형식 속에서 자유와 평등이 가르쳐질 수 있기는 한 것인가? 자유와 평등을 지시와 복종으로 탈바꿈시키는 헌법 강의 속에서 과연 우리는 우리 대한국민들의 정치적 상호고백인 헌법 문서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수험법학의 숙명을 변명거리로 내세울 수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내게 배우는 학생들에게만은, 수험 법학의 콘텍스트와 별개로, 헌법 문서가 실제로 말하고 있는 바가 통상적인 헌법 강의의 방식에 내포된 것과는 정반대에 가깝다는 점을 반드시 말해 주고 싶었다. 그 때문에 나는 매년 고집스럽게 이 희한한 집단 실험을 헌법 강의의 개시의례로 시도해 왔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1학년 때의 어느 가을 날, 한창 헌법 강의가 진행되던 15동 201호 대형 강의실의 풍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무료하게 자신의 헌법 교과서를 읽어 가는 유명한 헌법 교수님의 모습이 조그만 플라스틱 자를 헌법 교과서에 대고 열심히 줄을 쳐 가며 저자 직강을 따라 외우던 친구들의 뒷모습에 겹쳐져서 시간이 지날수록 흐릿해지던 그 풍경 말이다. 그 학기가 시작할 때, 나는 오랜 습관대로 강의실 맨 앞줄에 앉아 헌법 강의의 처음에 등장하는 헌법이니 국가니 주권이니 하는 개념들이 어떻게 정의되고 또 정당화되는지를 한껏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유명한 헌법 교수님의 포어레중은 도무지 그런 문제들에 관심이 없으며, 중요한 개념들의 설명은 단지 수험에 필요한 수준에서 별다른 논증 없이 툭툭 던져지기만 할 뿐임을 알게 되었다. 강의가 진행될수록 알 수 없는 실망감에 휩싸인 나는 점점 뒷줄로 이동했고, 결국 헌법 교수님과 친구들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한 뒤 혼자만의 자문(自問)에 빠졌었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헌법을 가르치고 또 배우는 것일까? 과연 이것은 헌법 강의의 올바른 방식일까?
돌이켜 보면, 헌정주의라는 단어는 입헌주의라는 이름으로 35년 전 내가 들었던 헌법 강의의 첫 부분에도 어김없이 등장했었다. 예를 들어 입헌주의를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헌법에 선언해 두고 자유와 권리가 국가권력에 의하여 침해당하지 않고 보호되도록 국가권력의 근거와 행사에 관한 규범을 헌법에 규정해 둠으로써 국가권력 작용이 헌법에 구속되도록 하는 통치 원리”로 규정하는 방식이다(김철수). 하지만 이 개념 정의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나는 왠지 그것이 무의미한 동어반복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왜 그것이 입헌주의의 정의(definition)인지를 정당화하려는 논증은 제시되지 않은 채, 단지 입헌주의를 그렇게 정의하기로 정한다는 선언만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불만에 차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