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이마에 얹히는 손 (전동균 시집)

한밤의 이마에 얹히는 손 (전동균 시집)

$12.00
Description
“말과 말 사이에 그늘이 펼쳐지면
나를 바라보는 당신이 보여요”
아픈 신(身/神)을 살아가는,
고요한 고투 속의 당신들에게

문학동네시인선 218번으로 전동균 시인의 시집 『한밤의 이마에 얹히는 손』을 펴낸다. 1986년 『소설문학』 신인상 시 부문을 통해 등단, 올해로 시력 40년에 육박하는 그의 여섯번째 시집이다. “부재 속의 존재, 보이지 않는 것 속의 보이는 것, 그리고 소란 속의 침묵이라는 명제를 시종일관 진지하게 탐색”한다는 평과 함께 제19회 노작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시인 전동균. 한국 전통 서정시의 수도승이라 부름 직한 그의 시세계, 그 속에서 태어난 백자같이 단단하고 검박한 시는 이번 시집에 이르러 그 완려함이 더욱 빛을 발한다.
그의 시는 표면적으로는 한없이 차분하고도 미니멀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 고요함은 팽팽한 시적 긴장감에서 연유한다. 마치 극한의 대치 또는 긴장 속에서 일순 정적이 이는 것처럼, 시인은 언제나 생과 언어 그리고 기존의 서정시와 대결하기에 시편 곳곳에 서늘하고도 날카로운 침묵이 배어 있다. 그래서일까, 시집에서 딱 두 번 등장하는 시어일 뿐이지만 ‘살얼음’에 눈길이 가는 건 필연적으로도 느껴진다. “숨어서 반짝이는 살얼음 같은/ 삶”(「천지간」), “내게로 오면 아슬아슬/ 살얼음 달”(「먼저 걸어가는 밤」). 맑게 반짝이는 동시에 그 위태로운 긴장 속에서 겨우 발견되고 또 쓰이는 전동균의 시가 꼭 그것과 닮았기 때문일 터. 이처럼 투명하고도 고요한 고투를 품은 57편의 시를 『한밤의 이마에 얹히는 손』에 담았다.
저자

전동균

저자:전동균
1986년『소설문학』신인상시부문에당선되어등단했다.시집으로『오래비어있는길』『함허동천에서서성이다』『거룩한허기』『우리처럼낯선』『당신이없는곳에서당신과함께』가있다.백석문학상,윤동주서시문학상,노작문학상등을수상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하루에한번쯤은거짓없는눈으로
내가만든건내가부수어야하므로/말하지마세요,내안에담긴게무엇인지/기록/내피에는약냄새가나고/아무데로나흘러가는/빗소리/슈퍼문/구석/구멍/나의사순절/이면지에쓰다/귀래/뿔

2부아침마다낯선곳에
원룸/빨래/춤추는TV/원룸에대한기록/아침마다낯선곳에/나무의자/눈물을빛으로/잠들때면/이밤은/비어있는침대/내가숨쉴때마다아픈/미제레레/머리카락한올/거기,당신들이있어/숟가락별/12월

3부첫고백인듯마지막약속인듯
별이돌멩이처럼/유월은/해가지면다시/이곡/눈/배론/소나기/훔쳐온볼펜/천지간/버려진모자/다대포/독락당모란꽃/막돌/그섬의개들/아직불어오지않은바람에떨며

4부말과말사이에그늘이펼쳐지면
찬란/꽃이때린다/우리도모르는사이에우리는/봄볕이여,당신이름을알려주세요/숨겨둔의자/이밤을무엇이라고말할까/예버덩/감나무아래/유품(遺品)/먼저걸어가는밤/멀리먼더먼/안과바깥/밤두시

해설|너머의당신에게
조대한(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한밤의이마에얹히는손,
촛불같고서리같은그손이누구것인지
더이상묻지말자

기도하지도말자,더외로워질뿐이니

잊고잊히는일은유정한일이어서
나는날마다
사라지는별의꼬리에매달려춤추는꿈을꾸고
아침마다낯선곳에와있고
_「아침마다낯선곳에」부분

시집의제목‘한밤의이마에얹히는손’은지극히인간적인손길을그리기도,그러다신의숨결을언뜻느끼기도하는단독자의고독을껴안는차원에서지어졌다.“사랑하는나의하나님,/내가숨쉴때마다당신은아프시니”(「내가숨쉴때마다아픈」)에서도마찬가지로발견되는신(身)과신(神)의불가분함.그속에서매일의아픈몸으로써낸“내가아니면아무도기록할수없는/기록하는순간/사라지고말”(「기록」)시적기록이야말로전동균의시와신‘들’이가까스로만나는교차로가된다.“자꾸늘어나는알약들에게새이름을붙여”가며“폐기종을앓아도담배를끊지않는”“불학무식”(「숟가락별」)의아픈몸으로하여금시인은어디로향하고자하는것일까?“내입속엔얼어붙은눈”같은약을머금고“바람속을,한밤같은햇빛속을/수많은그림자들을품고버리며”(「내피에는약냄새가나고」)기어코가닿고자하는경지(境地)는과연어디일까?

정면은
너무어둡거나너무환해요
도대체정체를알수없어요

이젠그너머를봐야겠어요

뿌리들은무슨열매를준비하고
알들은어떤죽음의깃털을다듬고있는지

세상이온통수렁같을때도
숨을좀가다듬고
더깊이,찬찬히살펴보면
숨어있는다른게보일지몰라요

꼬리를흔들며짖어대는
아침풀밭의이슬들,
유리창에부딪혀한쪽날개가고장난
천사의쑥스런표정,
냉장고문을열면방긋웃는새끼곰들

그래요나는지금
눈물을빛으로바꾸고있는중이랍니다

내발소리에놀라달아나는바퀴벌레에게
별일없나?밥은잘먹나?
안부를물으며
_「눈물을빛으로」전문

『한밤의이마에얹히는손』의4부구성은“눈물을빛으로바꾸”기위한순례의여정에다름아니다.‘나’의내면에서시작하여‘나의방’으로이어진후‘방밖’으로나갔다다시금‘나’로회귀하는시적순례.사전인터뷰에서밝힌바“삶과세계에대한질문과성찰을관념이아니라일상속에서부딪치며정제된시의언어로담고싶”었다는시인의진면모는특히2부‘아침마다낯선곳에’에서도드라진다.타지에서‘혼자생활’을하는시인의“마음이란게없었으면/기억들이다사라졌으면”(「비어있는침대」)싶은“일인용낮과밤”(「원룸」)속에서는“당신속에있는/당신도모르는”(「잠들때면」)당신을발견할수도있을것이다.
3부‘첫고백인듯마지막약속인듯’에서는원룸을떠나바깥세상에서마주한사람/사물/삶을통해써내려간시편을모았다.“내게도나는두렵고크고작고가난한것”(「눈」)이지만,“세상이아픈자들,대속(代贖)의맨발들”(「소나기」)을마주할때면“왜세상모든곳은/무덤이며성전인지”(「해가지면다시」)우리역시조금은알수있을것도같다.“세상으로부터/저로부터/스스로쫓겨난자의넘쳐나는갈증”(「독락당모란꽃」)은쉬이해소될수없으며,외려세상속에서더욱강렬해지기도하지만,시인은“좀더낮게/좀더아프게/한걸음더나아가”(「배론」)는염결한시적순례를결코서둘러끝낼수없다.

말을아끼려해요

말과말사이에그늘이펼쳐지면
나를바라보는당신이보여요

(…)

나는내것이아니에요
당신것도아니죠

우리는
밥과사랑과시간의하인
하룻밤새모든꽃을데려오고데려가는
바람의하인

누군가를미워하지않고는
누군가를그리워하지않고는
밥을구할수없고
잠을청할수없으니
_「안과바깥」부분

시인은“말을아끼”고“말과말사이에그늘이펼쳐”질때에야“나를바라보는당신이”보인다고말한다.이는,버리고아끼고비워낸‘시’와그시에쓰이지않은‘그늘(공백)’마저우리가감각할때에야시와시인이,시와독자가비로소마주보는지평이열린다는지극한시론으로도읽힌다.“할말만하는,다말하지않아도울림으로전해주는시”의몸은단출하고그표정은고요할수밖에없을것이다.어쩐지그자그맣고투명한몸은우리의시작과끝을닮지않았는가?시의몸은,아픈몸은그렇게‘신’과만난다.또한미지의당‘신’과『한밤의이마에얹히는손』은이렇게만나질것이다.“아직불어오지않은바람에떨며나는서있다/누군지모를당신과/가슴을맞대고”(「아직불어오지않은바람에떨며」),“모든사람을통과해/한사람에게로”(「구멍」).

하지만아이러니하게도전동균시인의작품들이탁월한종교시편들로남을수있었던것은그의언어가신앙의영역으로수월하게비약해버리지않았다는점때문이기도하다.이시집의어떤아름다움은신을그리고있다는사실이아니라,그에다가가기위한절망과기쁨을그려낸유려한언어그자체에서비롯된것이다.(…)그의생은절대자에게자신의모든죄와의무를떠맡긴종복의삶이라기보다는제몫의죄와슬픔을짊어지고스스로한걸음씩계단을오르는삶에가까울것이다.우리들은배고픔과공허함에쫓기다이내세월에마모될“밥과사랑과시간의하인”에불과할뿐이지만,의미를알수없이피투된이곳에서무언가를찾기위해필사적으로싸우며일렁이는시인의고투에서신앙과종교이전에치열하고충실한한인간의모습을본다._조대한,해설에서

전동균시인과의미니인터뷰

1.5년만의신작시집입니다.독자들께오랜만에시집을선보이는소감과더불어인사부탁드립니다.

가슴한쪽이파르르떨리는듯합니다.그런데이떨림속에서도이상하게뭔가홀가분한느낌이들기도해요.묵은짐을벗는것같기도하고요.이시집을만날독자들께는가만히곁에다가가물한잔건네드리고싶어요.

2.이번시집의주요한키워드하나를꼽아보자면‘신(身/神)’이라생각됩니다.제목‘한밤의이마에얹히는손’역시신‘들’을떠올리게하고요.이번시집을묶으시면서각별히신경쓰신부분이있다면알려주세요.

인간의육체와현실(身)/세계의원천이자궁극적실재(神)는이분법으로뚜렷이구분되기도하지만,저는함께있는거라고생각해요.신학은인간학이며,만약신이있다면그는우리집뒤뜰에도있다는말처럼.
교정지를읽으며되돌아보니문학적성취와는별개로,뭔가를질문하고찾아보려했다는느낌이들었어요.기억과망각,아프고환영(幻影)같은삶,인간이라는미스터리,단독자의고독같은것들이저를향해질문을해온것같기도하고요.이런삶과세계에대한질문과성찰을관념이아니라일상속에서부딪치며정제된시의언어로담고싶었습니다.

3.시편을읽고있노라면종교적인색채가배음처럼깔려있다는생각을하게됩니다.종교가작가님의삶과시에어떤영향을주고받고있는지들려주실수있을까요?

제시의종교적인요소들은어떤특정종교나교리가아니라앞서말씀드린존재론적질문과깊이연계되어있지않은가싶습니다.20여년전부친의죽음과은사구상선생님의장례미사를계기로가톨릭을만났는데,그일을통해개인적삶과문학의변화가좀있었던듯합니다.그후부산의학교로이직해혼자생활을하면서,또한동안은육체와정신의혼돈을겪으면서종교라는창을통해삶과존재의근원같은것을생각하게되었어요.이런생각과체험들이시에스며들게됐고요.
문학의종교성은인간과현실의심층,세상속에서세상너머를향하는도정(道程)을탐색하는일일텐데,이런종교성이인간/현실속에서육화된사례가우리현대시에서그리많지는않지요.몇몇시인들―예컨대김종삼시인의시는이런종교성의빛을지니고있다고생각해요.

4.편집과정에서‘깔끔한시’에대해서몇차례이야기를나누었던것같아요.‘깔끔한시’가무엇인지그리고그것이어떻게발생하는지말씀해주실수있을까요?

언어의근본은기록이고약속이니까,명징할수록좋지않을까요?물론,삶이혼돈이고진흙탕인데시를‘명징한언어’속에가둬둘수있느냐는반론이제기될수있고,그반론에도충분히공감을합니다.
다만저는생각과느낌이육화된시,그래서할말만하는,다말하지않아도울림으로전해주는시를좋아합니다.비유를하자면여름날저녁생맥주첫모금같은시―이런시는정신과언어의숙성속에어떤깊이와떨림을지니고있는데,그런게시의매혹이아닌가싶습니다.

5.작가님만의‘시읽기’노하우한가지를알려주세요.

저는편견/편향의시읽기를즐깁니다.좋아하는시인들의시를여러번반복해읽다보면의외의새로움과깊은맛을느낄수있지요.또그런새로움과깊이를통해전혀다른시인들의시/세계와연결되기도하고요.
시를읽는다는것은낯익어보이지만낯선세계와만나는일일텐데,시속에자신을투영하는‘창조적오독’이가장좋은시읽기중하나라고생각해요.매혹적인대목을만나면아끼는음식을먹듯이읽고,또연필로밑줄을그어놓고,시간이지난후다시그시들을읽으며자신과삶의변화를확인하는일도재미있고요.

시인의말

초록의숲길을걸으면서도
마음은때로
눈덮인산,헐벗은겨울나무들을향해걸어가곤했다.
그아래환영처럼서있는한사람에게로.

이면지에쓴
단독자의고백들.

말이멀어지고있다.

2024년7월
전동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