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의 길

번역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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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번역가는 태어나는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
서구문학은 흔히 번역이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실제로 서구 문학사의 첫 장은 번역에서 시작한다고 하여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번역이 중요한 것은 비단 서양문학뿐 아니라 한국문학을 비롯한 동양문학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번역은 한 문화권의 문학을 다른 문화권의 문학과 연결해 주는 교량 역할을 한다.
번역가란 육지와 육지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강을 건너게 해 주는 뱃사공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나룻배를 젓는 뱃사공이 없다면 한 육지에 머물 수밖에 없듯이 번역자가 없다면 한 나라의 문학도 민족문학의 울타리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영국의 번역 이론가 조지 스타이너는 “만약 번역이 없다면 우리는 침묵에 가까운 변방에 살고 있을 것이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우리가 이렇게 침묵 속에서 변방에 살지 않고 다른 나라들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며 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번역의 힘 때문이다.
저자

김욱동

한국외국어대학교영문과및동대학원을졸업한뒤미국미시시피대학교에서영문학문학석사학위를,뉴욕주립대학교에서영문학문학박사를받았다.포스트모더니즘을비롯한서구이론을국내학계와문단에소개하는한편,이러한방법론을바탕으로한국문학과문화현상을새롭게해석하여주목을받았다.하버드대학교,듀크대학교,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등에서교환교수를역임했다.현재서강대학교명예교수이다.

저서로...

목차

책머리에

1.번역가의길
‘번역자’와‘번역가’
원천어에대한문해력
원천문화에대한문해력
목표어에대한문해력
속담과전문용어의이해
인공지능시대의번역

2.번역과반역사이
피츠제럴드작품의오역
포크너작품의오역
헤밍웨이작품의오역

3.속담의성차별과젠더번역
암탉의은유적의미
암탉에관한서양속담
한국어의여성지칭어와호칭어
서양어의여성애칭어
젠더와번역

4.성경번역에대하여
개신교의문서사역
새술은새부대에
중국어와일본어의흔적들
떡인가,식물인가,무역인가
축역과의역사이
빵인가,떡인가,밥인가
성경의‘19금’번역
성경의창조적오역

5.어떻게번역할것이냐,그것이문제로다
햄릿의독백
일제강점기의『햄릿』번역
해방후의『햄릿』번역
1960년대이후의『햄릿』번역
『햄릿』과일본

참고문헌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번역가는남달리탁월한직관력과언어감각을갖추어야한다는점에서는생득적재능에무게가실린다.그러나원천어(sourcelanguage),즉번역할대상작품이쓰인언어를학습하는것은어디까지나후천적으로이루어지는작업이다.또한목표어(targetlanguage),즉외국작품을번역할언어를좀더갈고닦기위해서도후천적노력과훈련이필요하다.어머니의무릎에서자연스럽게습득한모국어가목표어가되는경우가대부분이지만모국어도끊임없이갈고닦지않으면누렇게녹이슬게마련이다.그렇다면시인처럼번역가에게도생득적자질못지않게중요한것이후천적훈련과교육이다.-19쪽

번역가는무엇보다도먼저원천어,즉번역할작품이쓰인언어에대한문해력(文解力)이뛰어나야한다.여기서‘독해력(讀解力)’이라고하지않고굳이‘문해력’이라고한데는그럴만한이유가있다.‘문해’를흔히‘문맹’의반대말로받아들여글을읽을줄아는능력으로이해하는사람들이적지않다.그도그럴것이문맹을뜻하는영어‘illiteracy’의반대말이다름아닌‘literacy’이기때문이다.국립국어원에서는문해력을“현대사회에서일상생활을해나가는데필요한글을읽고이해하는최소한의능력”이라고규정한다.한글의뛰어난가독성덕분에현재한국의문맹률은1퍼센트이하로거의모든국민이글자를읽고쓸수있다시피하다.한국이문화강국으로발돋움할수있었던것도따지고보면세계에서가장낮은문맹률이크게이바지하였다.-34쪽

번역가는목표어의‘낱말풀’을넓게확보하는것이아주중요하다.하늘을높이나는갈매기가멀리볼수있듯이어휘력이높은번역가가좋은번역을할수있다.여기서‘낱말풀’이라는말을사용했지만,어휘력은단순히낱말을얼마나많이알고있느냐하는문제에그치지않는다.물론되도록많은낱말을아는것이중요하지만양못지않게중요한것이질이다.번역가의어휘구사력을도형에빗대어말한다면넓고깊어야한다.여기서어휘의넓이란낱말의양을말하고,어휘의깊이란낱말의질과수준을말한다.모국어의낱말과관련하여번역가는①되도록낱말을많이알고있어야하고,②낱말의지시어와함축어를정확히이해해야하며,③이미알고있는낱말을적절히활용할수있어야하고,④동의어와반대어와유의어등을알고있어야하며,⑤가능하면낱말의어원,고어,외래어등도함께알고있어야하고,
⑥한자어를잘알고있어야한다.특히항목⑥은그냥지나치기쉽지만번역가에게아주중요하다.2019년의통계기준에따르면16만4,125개한국어중에서순수한토박이말은7만4,612개로45.5퍼센트,한자어는8만5,527개로52.1퍼센트,외래어는3,986개로2.4퍼센트를차지한다.한국어전체낱말중에서무려52.1퍼센트,표준어중에서57.9퍼센트가한자어다.또다른통계자료에따르면한자어의비중은이보다훨씬커서무려70퍼센트에이른다.그것은영어에서고대그리스어와라틴어에서유래한낱
말과앵글로색슨계통의토착어의비중과비슷한수치다.-60쪽

상상력의힘으로찬란한우주를창조하는문학작품의번역에서는의료나법률서비스는말할것도없고기술번역과비교하여인공지능의역할이그렇게크다고할수없다.비록그역할이크다고하여도인간두뇌의수준에이르기위해서는많은노력과시간이필요하다.창조적기능은비판적기능과는달라서하루아침에성취할수있는것이아니기때문이다.앞에서도언급한몇가지사례에서도볼수있듯이인공지능은인간처럼창의적사고를하기란여간어렵지않다.번역가가인공지능을능가할수있는가장중요한덕목중하나는다름아닌창의적상상력이다.그러므로번역가는이덕목을계발하는데최선을다해야한다.이러한창의적상상력을계발하고한껏발휘할번역가가바로‘전문’번역가일것이다.-80쪽

서구번역사에서최초의번역이론가라고하면흔히16세기에프랑스에서활약한인문학자에티엔돌레를꼽는다.흥미롭게도그는번역을충실하게하지않았다고하여화형을당한‘번역의순교자’이기도하다.플라톤의『대화편』을프랑스어로번역하면서인간의죽음다음에무엇이존재하는지에관한대목에이르러돌레는그만원천텍스트에없는“아무것도없다(riendutout)”라는구절을덧붙여놓았다.인간은사망하고나면그뿐그뒤에는아무것도존재하지않는다는말을부연설명해놓은것이다.그런데1546년소르본대학의신학교수들은이구절을근거로돌레가기독교의핵심교리중하나인영생을믿지않는이단자이며그의번역은곧신성모독과다름없다고몰아세웠다.모든길이로마로통하듯이,모든것이기독교로통하던16세기에그는이단의혐의를받기에충분하였다.결국이단자로몰려돌레는장작더미위에서불에타한자락연기로사라지고말았다.-82쪽

번역에서가독성이높다는것이칭찬받아마땅하지만늘미덕이되는것은아니다.정확성이뒷받침되지않는가독성은이렇다할의미가없기때문이다.가독성을높이려고번역하기어렵거나제대로이해하지못하는부분은생략해버리고번역하는번역가들이의외로많다.또한쉽게읽히기만하면‘좋은’번역이라고생각하는독자들이생각밖으로많다.거추장스럽다고잔가지를제거해버리고큰줄기만남겨놓으면나무모습은훨씬가지런하고예쁘게보인다.그러나그잘라낸잔가지속에작품특유의문체와심오한의미가들어있다면어떻게될까?원문을모르고번역본만읽는독자들은가독성에속아‘좋은’번역이라고평가하기십상이다.-91쪽

마르틴하이데거는일찍이“언어는존재의집이며인간은이집안에거주한다”고말하였다.그의말대로인간이언어의집에머무는존재라면아마인간의삶에서언어만큼중요한것도없을것이다.실제로인간은언어로써말하고언어로써생각하고언어로써판단하고언어로써결정한다.인간의의식과관련한행위는하나같이이렇게언어를떠나서는도저히생각할수없다.에드워드서피어나벤저민워프의지적처럼언어가생각이나사고를결정하든,이와는반대로H.폴그라이스의주장대로생각이나사고가언어를결정하든,아니면도널드데이비드슨의이론처럼언어와생각이상호작용을하든언어와인간의사고는떼려야뗄수없을만큼서로깊이연관되어있다.그렇다면하이데거의말을조금바꾸어언어는‘존재의집’못지않게‘사고의집’이라고하여도크게틀리지않을것이다.-134쪽

1990년대중반에이르러젠더문제는남성/여성차별의범위를뛰어넘어이제동성애차별을논의하는단계까지넓어졌다.즉‘성차별이나‘젠더차별’에서‘동성애차별’로발전하였다.‘성인지감수성’이라는용어는이제일상어에서자주쓰일뿐아니라법원판결문에도자주등장하는단계에이르렀다.남성이그동안여성을지배와종속의대상으로삼았듯이이성애자들은동성애를‘타자’로간주하여무시하거나금기시하였다.앞으로성차별은동성애는말할것도없고양성애자와트랜스젠더문제까지염두에두어야할지모른다.마찬가지로페미니즘번역도여성차별뿐만아니라동성애차별도중요한의제로삼아야할것이다.-170쪽

한국개신교의집은넓게는문서사역,좁게는성경번역의토대위에굳건히서있다.물론이집을짓는데는서양선교사들이모퉁잇돌의역할을했음은두말할나위가없다.여기서문서사역이란성경을번역하여출판하는것을비롯하여기독교잡지나신문등의정기간행물발행,기독교성격의일반잡지나신문발행,교회주보나소식지발행,기독교출판사의기독교단행본이나기독교성격의일반단행본출판등을말한다.지금한국에서는무려200여개의기독교출판사가있고,이곳에서해마다1,600여종의신간서적을출간하니한국개신교의문서사역이과연어떠한지미루어보고도남는다.개신교의이러한활동은활자매체보다는이미지나아이콘에무게를두는가톨릭교회와는확실히다르다.-176쪽

성경번역을비롯한모든번역은새로운시대마다새롭게다시이루어져야한다.앞에서이미밝혔듯이시간이지나면서언어의의미가조금씩변하기때문에한번번역된작품은영원히지속될수는없다.언어뿐아니라시대에따라독자의감수성도달라지게마련이다.이렇게언어의속성과독자의감수성에서번역은일정한주기를두고새롭게번역해야한다.이점에서번역을한옥에빗댈수있다.아무리튼튼하게지은집이라도세월이지나면지붕에얹은기와에물이새고서까래가기우는등세월의풍화작용을비껴갈수없다.-186쪽

성경번역은그동안서로다른신학이나교리가다투는전쟁터와다름없었다.성경을잘못번역했다고목숨을잃은사람들도있고,성경을제대로번역하여무지와몽매를구원의빛으로밝힌사람들도있다.또한성경은온갖번역방법이나전략을시도해온실험실과도같았다.인문학분야중에서도비교적뒤늦게태어난번역연구나번역학은성경번역에서자양분을얻으며성장해왔다.그러나한글성경은여러차례개정과개역을거듭해왔지만오히려‘개악’이된곳이더러있다.이러한오역이나졸역을수정하는것에그치지않고젊은세대의언어감각에맞도록번역하는데도좀더심혈을기울여야할것이다.-242쪽

번역의묘미중하나는아무리동일한문장을번역하여도번역자마다조금씩차이가난다는점이다.더러예외가없는것은아니지만같은문장을번역해놓은번역문이동일한경우는별로없고번역자에따라조금씩편차가있다.원문텍스트와번역텍스트를저울에달면으레천칭이어쩔수없이어느한쪽으로기울게마련이다.그것은언어의본질에서원천어와목표어사이에는등가관계가성립하지않기때문이기도하지만번역가의철학과도맞물려있다.이러한편차는의미나내용에서도일어나지만그보다는주로낱말이나어구,구문같은형식에서일어난다.이를달리말하면번역에서내용못지않게중요한것이문체라는말이된다.번역가가‘창조성’을발휘할수있는곳도바로이러한문체에서다.목표텍스트의의미나내용이원천텍스트와같다는전제아래번역가의독창성이빛을내뿜는것은다름아닌언어구사에서라고할수있다.-243쪽

1960년대에들어오면서『햄릿』번역은가히백가쟁명(百家爭鳴)의시대를맞이하였다.이때부터이작품의번역은그야말로우후죽순처럼한꺼번에쏟아져나왔다.이무렵활약한번역가로는여석기(呂石基)를빼놓을수없다.1964년정음사에서출간한『셰익스피어전집』4권은한국셰익스피어번역사에서한장(章)을화려하게장식한다.이전집에수록된『햄릿』을번역한사람이바로여석기였다.그는“Tobe,ornottobe:thatisthequestion”을“사느냐,죽느냐,그것이문제로다”로번역했다가뒷날문예출판사에서다시개정판을낼때는‘죽느냐’와‘사느냐’의위치를살짝바꾸어놓았다.

죽느냐사느냐,이것이문제로구나.
어느쪽이더사나이다울까?
가혹한운명의화살을받아도참고견딜것인가?
아니면밀려드는재앙을힘으로막아싸워없앨것인가?
죽어버려,잠든다.그것뿐이겠지.-260쪽

윌리엄셰익스피어의『햄릿』을번역하면서한국번역가들은일본어번역에서직간접으로크고작은영향을받았다.이러한현상은일제강점기에두드러지게나타나지만해방후에도일본어해독자들을중심으로어느정도여전히계속되었다.이점에서일본에서『햄릿』이그동안어떻게번역되어왔는지살펴볼필요가있다.이작품은일찍이메이지시대부터지금까지무려40편이넘는번역본이나왔다.그래서햄릿이‘덴마크의왕자’가아니라차라리‘일본의왕자’라고불러야한다고주장하는학자도있다.햄릿의독백이일본에서처음번역된것은메이지7년(1874)이다.물론이번역은정식번역이아니라당시요코하마(橫浜)의외인거류지에살던외국인들이발행한풍자만화잡지《일본펀치》에실린기사에근거한다.이잡지의편집자찰스워그먼은“아리마스아리마센아레하나데스카(アリマス, アリマセン, アレハナデスカ)”라는번역문장을삽화에실었다.“있습니다,있지않습니다,저것은무엇입니까”정도의의미로누가보아도일본인들의엉터리영어말투를조금조롱하는듯한말투다.-274쪽

20세기에가장활발하게활동한비평가로흔히평가받는해럴드블룸은시인의영향에관한독창적이론을전개하여관심을끌었다.후배시인은늘독창적상상력을선취한선배시인에게서받는영향에불안을느끼는데이러한‘영향의불안’이새로운시를창조하는원동력이된다는것이다.다시말해서블룸은문학전통의연속성보다는불연속성,즉후배시인들과선배시인들이펼치는갈등과투쟁의미학에무게를둔다.적어도이점에서는번역가도시인과크게다르지않다.나는후배번역가들이선배번역가들에게느끼는‘영향의불안’을‘독창성오류’라고부른다.번역가는독창성을지나치게내세우려는나머지오류를범하게된다.번역가에게무엇보다도소중한미덕은창작가의독창성이아니라원작자의의도를충실히살리려는번역가의성실성이라는사실을잊지말아야할것이다.-2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