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매일신보 세트(영인본) (1904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국문판 | 전 6권)

대한매일신보 세트(영인본) (1904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국문판 | 전 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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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서울 전동에서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하여 1904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 국문판
한(韓)·영(英) 양국어로 된 신문으로, 1904년 7월 18일 서울 전동(磚洞: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에서 영국인 베델[Bethell, E. T. 한국 성명은 배설(裵說)]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양기탁(梁起鐸)을 총무로 하여 창간되었다. 주필에는 박은식(朴殷植)이 활약하였고, 그 밖에 신채호(申采浩)·최익(崔益)·장달선(張達善)·황희성(黃犧性) 등이 필진으로, 임치정(林蚩正)·안태국(安泰國) 등이 경영에 참여하였다.
이 신문은 위기일로의 국난을 타개하고 배일사상을 고취시켜 국가보존의 대명제를 실현하고자 창간된 것으로 고종의 은밀한 보조를 비롯, 민족진영 애국지사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출발하였다. 그 체재는 종전의 것보다 큰 세로 40㎝, 가로 27㎝로서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6면으로 국문 2면, 영문 4면이었다.

이러한 편집형태를 취한 것은 긴급한 사실을 보도할 수 있는 일간신문이 필요하였고, 영국인과 합작한 한영합판(韓英合辦)의 조직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인을 내세운 이유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불법주둔하면서 전쟁을 이유로 대한제국의 민간신문에 대한 사전검열을 강행하였는데, 이러한 일본의 검열망을 뚫을 수 있는 길은 당시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인 명의로 신문을 발행하는 길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창간 이듬해인 1905년 8월 11일부터는 다시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시켜 따로 발행하였다. 창간 당시 순한글로 만들었던 국문판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만들었고, 영문판은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라 하였는데 대내외에 많은 구독자를 얻었다. 그러나 국한문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의식하여 1907년 5월 23일 순한글판 『대한매일신문』을 새로 창간하여 결국 국한문판·영문판·순한글판 등 세 신문을 발행하게 되었고 발행부수도 1만 부를 넘었다.

이처럼 이 신문이 발전된 것은 일본군의 사전검열을 받지 않는 유일한 신문이라는 것과 그 보도와 논평이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것이라는 데 연유하였다.

당시 일본군과 싸우는 우리의 의병에 대하여 사전검열에서는 이를 비도(匪徒) 혹은 폭도(暴徒)로 표현하도록 강요하였으나, 『대한매일신보』계의 세 신문은 한결같이 사실 그대로 의병운동을 보도하였다.

이와 같은 보도는 당시 우리 국민에게 커다란 용기와 위안을 주었다. 이와는 반대로 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伊藤博文]는 한 연설장에서 “……한국 내 신문이 가진 권력이란 비상한 것이다. 이토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一筆)이 한인(韓人)을 감동하게 하는 힘이 매우 크다. 그 중에도 지금 한국에서 발간하는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확증이 있는 일본의 제반 악정을 반대하여 한인을 선동함이 연속부절하니 이에 관하여는 통감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대한매일신보』에 대해서 통감부 당국은 회유와 매수작전 등 갖가지 수법으로 그 논조를 꺾으려 하였으나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러나「신문지법(新聞紙法)」을 일부 고쳐 내국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신문과 외국에서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 등을 압수 및 판매금지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고, 이어 베델(배설)과 양기탁을 구속 또는 국외로 추방하는 방안을 구상하였다.

그리하여 첫번째로 1907년 10월 9일 주한 영국총영사 코크번(Cockburn)에게 베델(배설)의 처벌을 요구하는 소송장을 냈는데, 그들은 국한문판 및 영문판의 9월 3·12·21·26일자, 한글판 9월 18일자, 10월 1·8일자 등의 기사가 공중평화를 해치고 인민으로 하여금 정부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하였다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1908년 5월 27일 영국 상해고등법원 검사 윌킨슨(Wilkinson, H. P.)과 연서(連書)로써 베델(배설)을 제소하였다. 이번에도 국한문판 1908년 4월 17·29일자, 5월 16일자의 논설이 우리나라의 질서를 문란하게 하였으며, 폭동을 격려하고 우리나라 정부와 인민 간에 원수되는 뜻을 격동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6월 15일부터 3일간 주한 영국총영사관에서 열린 공판에서 논설은 양기탁이 집필한 것이며, 베델(배설)은 그 전권을 양기탁에게 맡기고 있었음이 밝혀졌으나, 재판장 보온(Bourne, F.S.A.)은 베델(배설)에게 제1종 경벌죄의 유죄를 선고하였다.

세번째로 1908년 같은 해 7월 12일 밤 돌연 양기탁이 구속기소되었다. 영국총영사 코크번은 양기탁의 즉시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통감부는 구속이 아니라 잠시 유치(留置)한 것일 뿐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리고 양기탁에게 국채보상의연금(國債報償義捐金)을 횡령, 사취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기소하였다. 그러나 전후 5차에 걸친 공판 끝에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무죄석방되었다.

이러한 탄압과 싸우던 과정에서 베델(배설)이 물러나고 비서였던 영국인 만함(万咸, Marnham, A. W.)이 사장이 되었는데, 1910년 6월 14일 만함은 갑자기 판권 일체를 전 사원이었던 이장훈(李章薰)에게 금 4만 원에 매도하고 우리나라를 떠나버렸다. 그리하여 6월 14일자(1408호)부터 이장훈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양기탁은 각 신문에 광고를 내어 자신은 이 신문에서 손을 떼었다는 것을 밝혔다. 이미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뜻대로 통감부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리하여 8월 28일까지(1461호) 발행되다가 경술국치 다음날부터 ‘대한(大韓)’의 두 자를 떼어낸 채 『매일신보』가 되어 총독부기관지로 바뀌었다.

『매일신보』는 1945년 11월 10일 정간 처분이 내려졌고, 이후 『서울신문』이란 이름으로 변경해 1945년 11월 23일자 석간부터 속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손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당시 일본의 언론탄압 속에서 외국인의 치외법권을 이용, 신속한 보도와 준열한 논설로써 대중을 계몽하고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로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저자

베델

베델
대한제국과일제치하에서활동한영국국적을가진언론인으로《대한매일신보》와《데일리코리안뉴스》의발행인이다.한국식이름은배설(裵說)

영국사우스웨스트잉글랜드브리스톨(Bristol)출생으로16살때부터일본고베에서거주하며무역업에종사하였다.이후분쟁이발생하여사업을접었고런던데일리크로니클의특별통신원직에지원하여1904년한국으로건너왔다.

처음에는러일전쟁관련취재를위한입국이었지만일제가한국을괴롭히는것을보고분개하여일제의침략상을고발하는《대한매일신보》를양기탁과함께창간했다.[3]당시체결되어있던영일동맹의이점을최대한살려일제에게치외법권을내세우며신문사에"개와일본인은출입을금한다."는간판까지달아저항하였으나일본정부가영국정부에게이문제를해결해달라고간청하여제소까지걸어결국벌금과금고형을선고받는데금고기간이끝나자다시한국으로돌아왔다.그러나재판과정에서건강을해치는바람에1909년5월1일한국에서향년37세의젊은나이에심장병요소중하나인심근비대증으로사망했으며시신은합정역근처의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안장되었다.묘비에는장지연이비문을썼지만늘베델을눈엣가시로여기던일제는이비문마저깎아버리는만행을저질렀는데수난당한묘비는1964년4월4일편집인협회가전국의언론인뜻을모아성금으로그묘비옆에조그만비석으로비문을복원하였다.
그가죽은뒤에도신문사는유지되었으나《대한매일신보》는경술국치다음날부터유명세를악용당해'대한'제호만떼어낸친일신문《매일신보》로바뀌어조선총독부의기관지가되고말았다.해방이후에는서울신문으로바뀌었다.
서울합정동양화진외국인묘지입구쪽에베델의묘가있으며,1968년정부는고인에게건국훈장대통령장(2등급)을추서하였다.

목차

1-1904.08∼1905.03
2-1905.04∼1906.07
3-1906.06∼1907.07
4-1907.06∼1908.07
5-1908.08∼1909.07
6-1909.08∼19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