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의 조건 (정윤경 시집)

화석의 조건 (정윤경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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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그리움은 떠나간 존재가 마음속에 남겨놓은 가장 깊은 흔적이다. 시간은 많은 것을 지우지만, 어떤 기억은 냄새와 소리와 빛의 감각 속에 숨어 있다가 문득 현재의 삶으로 되돌아온다. 정윤경의 첫 시집 『화석의 조건』은 그렇게 돌아온 기억들을 하나씩 불러내어 사라진 존재에게 새로운 주소를 마련해 준다. 시인은 어머니와 할머니, 아버지와 형제, 고향과 유년의 시간을 호명하며 그리움이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지탱하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시집의 첫 작품 「엄마는 얌전하다」에서 화자는 “엄마를 들고 집에 왔다”고 말한다. 이국의 호수에 어머니를 남겨두지 못한 화자는 어머니를 비행기에 모셔 와 서재에 눕힌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현실은 절제된 문장 속에서 더욱 깊은 슬픔을 드러낸다. 화자는 어머니가 햇빛에 탈까 분홍치마를 입히고, 매화꽃이 피어나는 집을 마련해 드린다. 벚꽃과 매화꽃은 떠난 어머니를 현재의 시간 속에서 다시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표지다. 그리움은 여기서 부재를 견디는 마음이며, 죽은 이를 꽃과 햇빛 곁에 다시 모시는 애도의 방식이 된다.
「모딜리아니, 나의 페르소나」의 “그리움 쪽으로 향한 길고 긴 목”은 이 시집의 시적 방향을 상징한다. 길어진 목은 닿을 수 없는 존재를 향해 내민 마음의 형상이다. 시집 속 인물들은 자주 손을 내밀고, 이름을 부르고, 냄새의 자취를 따라간다.
가족에 대한 기억은 시집 곳곳에서 냄새와 소리로 되살아난다. 「벽장 안에 바람이 산다」의 벽장에는 박하사탕과 호두과자의 냄새, 할머니가 내어주던 바람이 남아 있다. 「쓸쓸을 방목하다」에서는 굴뚝의 밥 짓는 냄새와 저녁노을이 엄마를 그리워하던 아이의 마음을 불러낸다. 「철길 끝에는」 속의 아이는 새엄마에게로 가던 기찻길을 되짚으며 “엄마가 보고 싶어, 집에 가고 싶어”라고 되뇐다.
이러한 그리움은 가족사의 울타리를 넘어 늙고 병들고 소외된 존재들에게로 넓어진다. 먼 이국의 노인 아파트에서 고향의 쑥개떡 냄새를 떠올리는 「내 이름은 메리로우, 연희 Lee」의 노인, 감자탕집에서 등판의 잉어와 한 그릇의 밥을 나누어 먹는 「잉어를 키우는 법」의 남자, 수술대 위에서 한때의 날렵한 몸을 잃어가는 「청개구리」의 인물이 그들이다. 시인은 낯선 사람의 몸에서도 그가 지나온 젊은 날과 고향, 가족의 목소리를 읽어낸다.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의 상실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곰팡이와 초파리, 도다리와 청개구리, 자판기와 컴퓨터 자판 같은 일상적인 소재들도 이 시집에서는 기억을 열어젖히는 특별한 통로가 된다. 「잊혀진 것들의 꽃」에서 버려진 화분과 잊어버린 빵은 저마다 꽃을 피운다. 시인은 “모든 퇴색된 것들은 꽃을 피워낸다”고 말한다. 곰팡이꽃과 소금꽃은 시간 속에서 낡고 상한 것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을 보여준다. 여기에 언어유희와 우화적 상상력이 더해지면서 시집의 정서는 슬픔 속에서도 생기를 얻는다.
표제작 「화석의 조건」에서 화석은 오래전 생명이 남긴 흔적이면서 “초록 풀들의 기억”을 간직한 시간의 몸이다. 이 시집에 새겨진 그리움도 그러하다. 어머니와 할머니, 아버지와 유년의 자신은 과거의 지층 속에 머물면서 오늘의 화자를 끊임없이 흔든다.
이 시집 『화석의 조건』을 읽는 일은 우리 안에 묻혀 있던 이름들을 다시 부르는 일이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얼굴과 목소리, 오래전의 냄새와 손길이 시인의 언어를 따라 하나씩 돌아온다. 그리움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향해 길게 내민 목이며, 떠나간 존재와 오늘의 나를 이어주는 마음의 길이다. 정윤경의 시는 그 길 위에서 사라진 것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기억하고 이름을 부르는 동안, 그들은 꽃으로 피어나고 바람으로 돌아와 다시 우리의 삶을 환하게 밝힌다.
저자

정윤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