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라기 (신정모 시조집)

빛바라기 (신정모 시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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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신정모의 시조집 『빛바라기』를 관통하는 중심 이미지는 ‘빛’이다. 시인은 “시조는 빛이 머무는 삶터”이며 “빛을 찾아가는 지난한 여행”이라고 말한다. 이때 빛은 삶의 어둠, 즉 가난과 노동, 상실과 고독의 시간을 견디는 가운데 조금씩 길어 올리는 희망이고 삶의 힘이다. 그러므로 이 시조집에서 빛을 바라보는 일은 살아갈 이유를 찾는 일이고, 빛을 벼리는 일은 고단한 현실을 딛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표제작 「빛바라기」에는 이러한 시적 지향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박스집 구석에서 밤을 새운 사내는 “햇살 한 줄기 움켜 안고” 눈을 뜬다. 빈 주머니와 무직의 그림자가 그의 삶을 짓누르고 있지만, 그는 담쟁이가 벽을 오르듯 하루하루 다시 발을 딛는다. 시인은 그 미약한 움직임 속에서 “볕뉘 한 줄”을 발견한다. 햇살을 두드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마침내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아오는 그의 모습은, 삶의 빛이 수고와 인내의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빛의 근원에는 노동으로 한 생을 견딘 부모 세대가 있다. 「지게」에서 아버지는 “천만 근 끼닛거리”를 짊어지고 가난의 고개를 넘는다. 해묵은 외양간에 남은 지게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아버지의 굽은 등과 혼이 어른거린다. 「마디」와 「뙈기밭에서」에는 팔 남매를 기르며 호미질과 쟁기질로 세월을 버틴 어머니의 생애가 새겨져 있다. 어머니의 굽은 허리와 깊은 주름은 고통의 흔적이면서 가족을 일으켜 세운 사랑의 기록이다.
자연은 인간이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또 하나의 스승이다. 『빛바라기』의 풀과 나무, 이끼와 꽃망울은 척박한 조건 속에서도 제 생명의 방향을 잃지 않는다. 「바랭이풀」의 풀은 “밭고랑 긴 어둠을 손끝으로 밀어내고” 돌 틈에 몸을 세운다. 「이끼」의 생명 또한 짓밟히고 으깨어진 자리에서 푸른 피를 퍼뜨린다. 그늘진 바위틈에 이름 없이 살아가면서도 메마른 뼈마디를 껴안고 한 줄기 볕뉘를 향해 나아간다. 시인은 이 낮고 연약한 생명을 두고 “꽃보다 낮은 자리 더 눈부신 생명”이라고 노래한다.
이 시조집에서 시인의 시선은 개인과 가족의 기억에서 동시대의 현실로 넓어진다. 「갈매기의 포효」는 탄소 배출과 플라스틱 쓰레기, 백화현상으로 병들어가는 바다의 비명을 들려준다. 돌고래와 산호, 거북과 갯벌의 고통은 인간의 삶과 이어진 하나의 생태적 사건이다. 시인이 꿈꾸는 빛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이 함께 살아갈 터전을 회복하는 빛이다. 검은 물이 씻기고 은빛 비늘이 다시 넘실대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훼손된 세계를 되살리려는 간절한 생명 의식이 담겨 있다. 「피로한 대화」, 「메타버스에 올라」, 「반딧불이의 그늘」, 「휴먼 릴리푸트」 등은 디지털 문명과 인공지능 시대의 불안까지 시조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정보와 속도가 인간의 감각을 압도하고, 숫자와 아이콘 사이에서 ‘나’를 잃어가는 현실을 바라보며 시인은 잠시 버튼을 끄고 자기 안의 고요와 마주할 것을 권한다.
신정모의 시조는 전통적인 율격 안에 오늘의 노동과 생태, 기술 문명과 사회 현실을 폭넓게 담아낸다. 지게와 호미, 장독대와 한지 같은 전통적 소재가 키오스크, 인공지능, 메타버스와 나란히 놓이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 여기에 ‘심알’, ‘밑동받이’, ‘시삐보다’, ‘솝뜨다’와 같은 토속어가 더해져 우리말의 오래된 촉감과 생활의 숨결을 되살린다.
『빛바라기』는 삶의 어두운 밭을 묵묵히 갈아 한 줄기 빛을 일구는 시조집이다. 그 빛은 고난을 견디는 사람들의 마음을 비추고,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갈 길을 밝히며, 아직 오지 않은 새날을 향해 오래도록 번져 갈 것이다.
저자

신정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