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 긋던 마른 붓질 (김경미 시조집)

동백 긋던 마른 붓질 (김경미 시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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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김경미의 세 번째 시조집 『동백 긋던 마른 붓질』을 관통하는 정신은 존재에 대한 따뜻한 환대이다. 시인은 “너를 틔우다 앓는다. 그러다가 조금은 감싼다.”라는 짧은 말로 자신의 시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로 향하는지를 밝힌다. 한 존재를 틔운다는 것은 그가 지닌 가능성을 믿고 기다리는 일이다. 그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따른다. 타인의 상처와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아픔처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께 앓은 뒤에야 시인은 그 존재를 조심스럽게 감싼다. 이 시집에서 환대는 이렇게 타자의 고통을 함께 견디는 마음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시인의 시선은 이름을 얻지 못하고 세상의 변두리로 밀려난 존재들에게 오래 머문다. 「이름 없는 이름에게」에서 “이름 하나 얻지 못해도 어딘가 가서 닿기를” 바라는 마음은 호명되지 못한 존재를 향한 간절한 기원이다. 이름은 한 존재가 세상에 받아들여졌음을 증명하는 최초의 자리다. 이름조차 얻지 못한 존재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떠돌 수밖에 없다. 시인은 그러한 존재의 슬픔을 발견하고, “슬픔이 슬픔을 잡고 갈 길 서로 묻는다”고 쓴다.
이러한 환대의 정신은 작고 사소한 일상의 풍경에서도 발견된다. 「뒷주머니 처방전」은 사람이 앉을 때마다 “제대로 납작해”지는 뒷주머니를 생존의 무게에 눌린 존재처럼 바라본다. 그러나 시인은 “철퍼덕 포기 앞에선/일어서는 것이 답이다”라고 말하며 그 납작해진 존재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무심한 손길 한 번이/내겐 환한 봄날이다”라는 구절에는 이 시집의 윤리가 선명하게 담겨 있다. 누군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손길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긴 겨울을 끝내는 봄날이 될 수 있다.
이 시집의 언어와 시인의 시선은 전반적으로 긍정적이다. 이런 긍정성은 삶의 어둠과 결핍을 통과하며 형성된다. 「청귤의 시간」에서 아직 익지 않은 청귤은 미숙한 존재의 자화상이다. 풋것의 시큼함과 의심의 시간을 견딘 끝에 “어느새 단맛이 고여 전율 알알 퍼진다.” 시인은 미숙함을 부끄러워하거나 서둘러 지우려 하지 않는다. 아직 익지 않은 존재에게도 자기만의 시간이 있으며, 그 시간을 충분히 견디면 언젠가 삶의 단맛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이 시집의 시들이 무한 긍정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현실의 상처를 가볍게 무시하거나 희망으로 쉽게 덮지 않는다. 시인은 불안정한 노동, 관계의 상품화, 창작의 좌절과 같은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 속에서 다시 살아갈 힘을 찾아낸다. 그 힘은 함께 울음을 견디는 몸, 무심히 건네는 손길, 아직 익지 않은 시간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시집 제목의 ‘마른 붓질’ 또한 메마른 삶의 표면에 동백의 붉은 생명력을 다시 그어보려는 시적 의지로 읽힌다.
김경미 시인은 시조의 압축된 형식 안에 생활의 구체성과 언어의 활력을 밀도 있게 담아낸다. 「뒷주머니 처방전」, 「포대기 포개기」처럼 친숙한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제목에서부터 「사드리 헵번」, 「그럼에도 달려가馬」, 「8과 ∞」, 「대한大寒 플랫폼」에 이르는 언어유희까지, 시인은 정형의 틀 안에서 말을 자유롭게 비틀고 움직인다. 이러한 재치와 유머는 고단한 삶을 견디게 하는 또 하나의 힘이다. 웃음은 현실의 무게를 잠시 들어 올리고, 익숙한 세계를 낯선 각도에서 바라보게 한다.
『동백 긋던 마른 붓질』은 상처 입고 납작해진 존재, 이름을 얻지 못한 존재,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존재, 아직 충분히 익지 못한 존재들을 환대하는 시집이다. 삶은 여전히 고단하지만 누군가를 감싸는 손길이 남아 있는 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김경미의 시조는 그 소박하고도 굳센 믿음을 동백처럼 선명하게 그려낸다.
저자

김경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