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이후 (신순금 시집)

초록 이후 (신순금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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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신순금 시인의 시집 『초록 이후』에는 상처와 상실을 통과하며 조금씩 넓어지는 마음이 담겨 있다. 부모를 떠나보낸 슬픔과 몸의 통증, 오래 품어온 후회는 나무와 꽃, 새와 돌의 모습에 스며든다. 시인은 그 존재들과 마주하며 자신의 삶을 다시 읽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며, 이들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배운다. 이 시집의 초록은 그렇게 관계 속에서 새롭게 얻은 생명의 색이다.
시인이 자연을 바라보는 눈에는 다른 존재에 대한 존중이 깃들어 있다. 이를테면 「느티나무 평전」에서 고목은 시멘트로 메운 흉터를 지닌 채 고운 잎새를 밀어 올린다. 화자는 수백 년 묵은 나무의 문장을 자신이 다 읽어낼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앞에서 다시 신발끈을 묶는다. 나무를 돌보는 사람의 손길과 그 손길을 받아 초록을 피워내는 나무의 힘이 하나의 풍경을 만든다. 자신의 통증에 붙들려 있던 시선은 이 만남을 통해 더 오래 살아온 생명의 시간으로 열린다.
이러한 시선의 변화는 가족의 기억을 돌아보는 작품에서 깊어진다. 한때 아버지를 타인처럼 여겼던 화자는 「비포장길」에서 자신이 읽기를 거부했던 아버지의 속내를 생각한다. 손수레를 미는 등이 부끄러웠던 어린 시절을 지나, 북에 남겨둔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아버지의 외로움을 뒤늦게 헤아리게 된 것이다. 자신에게 아버지였던 사람도 누군가의 아들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기억 속의 모습에는 새로운 깊이가 생긴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역시 일상의 사물과 행위 속에서 이어진다. 「기억을 먹는 아침」에서는 딸과 며느리의 자리가 뒤바뀌는 혼란 속에서도 “밥 먹어라”라는 말과 부뚜막의 온기가 남는다. 기억이 흐려져도 몸에 밴 보살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약탕관과 익모초, 도마질 소리와 밥 짓는 풍경에도 어머니의 시간이 배어 있다. 시인은 그 익숙한 감각들을 불러내며 자신이 받아온 사랑의 크기를 다시 알아간다.
이런 포용의 태도는 식탁에 오르는 작은 생명에까지 이른다. 「다시 멸치」에서 손톱 사이를 찌르는 가시는 죽은 멸치의 마지막 비명처럼 느껴진다. 망망대해를 헤엄치던 생명이 그물에 걸리고 주방으로 옮겨오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익숙한 식재료에 가려졌던 목숨의 흔적이 드러난다. 시인은 사소한 접촉을 통해 자신과 다른 생명의 관계를 새롭게 의식한다. 나무의 흉터를 읽고, 낯선 대화를 바라보고, 작은 가시에서 비명을 듣는 움직임은 세계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넓어지는 과정이다.
이러한 정신적 성숙의 과정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둥근 위로」다. 파도리 해변의 몽돌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상처를 다스리며 모여 있다. 화자는 그 돌들에서 물러서지 않던 젊은 날과 여기까지 밀려온 자신의 시간을 본다. 철새가 잠시 머물고 별빛이 어깨를 내어주는 풍경 속에서 파도에 대한 두려움도 잦아든다. “서로/둥글어지는 일”이라는 구절은 함께 살아온 시간의 의미를 압축한다. 부딪치고 상처받으면서도 곁을 내어주는 관계 속에서 사람은 조금씩 다른 존재를 품을 수 있게 된다.
이 시집 『초록 이후』의 성취는 익숙한 생활과 자연의 풍경에서 이러한 내면의 변화를 길어 올리는 데 있다. 나무의 흉터와 어머니의 밥, 수화하는 손과 몽돌의 소리는 구체적인 감각을 통해 독자의 삶에 닿는다. 회한을 숨기지 않는 고백과 대상의 사정을 살피는 시선이 어우러지면서, 개인의 기억은 함께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사유로 깊어진다. 신순금의 시가 보여주는 정신적 성숙은 자신과 타인의 불완전한 삶을 받아들이고 서로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과정이다. 그 마음이 넓어지는 자리에서 삶은 다시 초록을 얻는다.
저자

신순금

2008년 『문학과 의식』 등단
시집 『문득, 나를 부르면』 『초록 이후』
천안문화재단창작지원금 수혜 (2020, 2026)
현)천안문인협회, 시소 회원

목차

1부 그곳으로 떠밀리다 맞닿는 시간

그 길에 들었다/ 느티나무 평전/ 지지 않는 해/ 몸꽃이 피었다/ 무너지는 산/ 바람무덤/
목소리/ 네가 무엇이어도 좋다/ 부주의한 계절/ 우주로부터 온 자장가/ 기억을 먹는 아침/
기다리면 곶, 감/ 저 별이 먼 줄 알았다/ 하루의 끝을 노을노을 다독이며/ 독설/ 술의 말

2부 봉숭아 씨앗을 툭, 터뜨리는 바람

공룡 등에 핀 노랑나비/ 푸른 숨을 널다/ 떡 하나 주면/ 비워지는 순서/ 시들지 않는 여름/
침묵이 들끓는다/ 白日夢/ 세잎클로버/ 모든 선택은 새로운 길/ 엄마꽃/ 벚꽃 안부/ 녹차꽃 필 때까지/ 네가 부르면 무엇이든 꽃이 된다/ 섬진강 벚꽃/ 삭은 밥알이 떠오르는 밤/ 다시 멸치/ 손 없는 집

3부 자작나무숲으로 오후가 비스듬히

손으로 전하는 꽃말/ 동백/ 아직 도착하지 않은 봄/ 맨발로 사뿐 날아올라요/ 평생지기/
손을 잡을까요?/ 음마 음마/ 왼손 글씨/ 아지랑이, 겨울/ 느닷없이 엎어지다/ 초록 이후/ 정지된 시간/ 바람이 바다로 뛰어들 때/ 양파를 썰다가/ 풀잎꽃 나뭇잎꽃/ 이제 좀 쉬세요/ 그믐의 육체

4부 구름은 한 발 한 발 그늘을 밀어 넣고

이 봄을 껴안다/ 둥근 위로/ 버드나무 할머니/ 비포장길/ 밥솥에 사는 뻐꾸기/ 겨울이라는 집중/
젖은 밥/ 막차는 기타 소리로부터 온다/ 공감이라는 병/ 비자림에서 사시다/ 투명하고 환한 슬픔/
나란히 바라보는 하루/ 아침은 아득하다/ 잠시 길을 잃는 중/ 여름을 낳는 나무는/
약탕관에서 살다/ 십일월에 질문을 달고


해설 _ 세계선世界線을 건너는 기억의 문법
전형철(시인, 연성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