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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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여자들의 말하기는 저항이고 투쟁이에요”

여성의 목소리로 국가보안법을 이야기한다는 것
그동안 여성의 목소리는 왜 들리지 않았는가?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있어?”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있어?”
있다.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12월 1일 제정되었다. 당시 검찰총장조차 “가벼운 매로 대할 사안을 도끼로 대응하는 것 같아 너무 무겁다”고 우려할 정도로 제정 당시부터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법이었다. 하지만 극우 반공 세력은 “보안법 폐기 주장은 공산당을 돕는 행위”라고 강변하며 힘으로 밀어붙여 이 법을 만들었다. 1949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투옥된 사람은 무려 11만 8,621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1949년 10월 형무소 두 곳을 새로 만들기로 결정할 정도였다. 그 이후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가보안법은 한국인의 눈과 귀를 가렸고, 심지어는 마음속 생각까지 검열하도록 만들었다.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한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이 이 법으로 희생되었고, 아직도 작동되고 있는 중이다.
저자

홍세미

인권기록활동가
사람과이야기,함께사는삶에관심이있다.눈여겨보고귀기울여듣기위해노력한다.《1995년서울,삼풍》《나를보라있는그대로》《나,조선소노동자》등을함께만들었다.

목차

여는글
침묵과망각에반하여

우리는선택했고그결단에따라감수한것이죠
구술김은혜,글강곤

여자들의말하기는저항이고투쟁이에요
구술유숙열,글홍세미

국보법이폐지되면그자리에서춤을출거여
구술정순녀,글홍세미

세상에눈을뜨니너무자랑스러운거여
구술김정숙,글이호연

기억되지못한시간들-봉인된24년
구술고애순,글유해정

내청춘은역사도,경력도되지못했다
구술양은영,글유해정

종이한장의무게
구술유해정,글강곤

오빠를간첩이라했던제괴로움을저들은모릅니다
구술유가려,글강곤

우리는그렇게몰아가도되는사람이었던거예요
구술배지윤,글박희정

이렇게하면서까지국가가원했던게뭔가요?
구술안소희,글박희정

차라리살인죄라면……
구술권명희,글홍세미

덧붙이는이야기
‘분단’과젠더-정희진

구술자들이겪은사건들

출판사 서평

“이제는국가보안법을박물관으로!”

“국가보안법을박물관으로!”
이제는국가보안법을없앨때가되지않았을까?이책은‘국가보안법을박물관으로’라는시민운동을준비하면서국가보안법이폐지되어국가보안법박물관이만들어진다면,국가보안법과관련된목소리들을기록하고보존해야한다는문제의식에서출발했다.이책의글쓴이들(홍세미,이호연,유해정,박희정,강곤)과사진가(정택용)는오랫동안한국사회의현장에서기록활동을펼쳤던이들이다.용산참사,밀양송전탑,형제복지원,세월호참사,비정규직투쟁,고공농성등한국사회의모순이폭발할때마다현장으로달려가기록을남겼다.그들이이번에는‘여성서사로본국가보안법’프로젝트와만났다.
이책에담긴목소리의주인공들은1970년대대학생이었던이들부터이제막40대에이른이들까지다양하다.1980년대5공화국시절부터최근10년도안된사건의피해당사자이거나관계자들이다.국가보안법투쟁의산증인이자언제나최전선에섰던민가협어머니들부터탈북민간첩조작사건피해자를망라한다.국가보안법과맞닥뜨렸을때이들은보통의어머니였고,아내였고,기자였고,운동권대학생이었고,시의원이었고,북한이탈주민이었다.그리고이들의공통점은모두여성이라는점이다.또한이들은국가보안법과마주하면서큰고통을겪긴했지만.피해자에서정치적주체로거듭나기도했다.

왜여성의목소리를들어야하는가?

왜국가보안법역사에서여성의목소리를들어야하는가?한국민주화운동역사에서여성들의공헌은대단하다.하지만지금까지남성들중심으로소개되어왔다.국가보안법의피해와저항의역사에서도여성들의목소리는들리지않았다.남편이나아들이국가보안법으로구속되어도그뒤에서‘옥바라지’를하고,구속자석방운동을한여성들의존재는잘드러나지않았다.같은국가보안법피해당사자이지만여성보다남성이더사회적으로인정을받은건사실이다.곧한국사회에서여성들이겪었던피해와저항의경험들,그질곡들은질문되지않았다.어쩌면여성들이야말로말의세계에서배제되고감금된이들이지않을까?이제늘조연의자리에서질문받던여성들이주연으로등장하는것이아니라여성의목소리를통해주연과조연을나누는기준이무엇인지를묻고,그기준을다시설정해야하지않을까?그런의미에서이책에서는여성들의목소리를전면에내놓게된것이다.
그렇다면여성의삶으로국가보안법을본다는것,여성의목소리로국가보안법을이야기한다는것은어떤의미일까?첫째,역사다시쓰기다.여성들의증언을모으는것은단지역사속에부재한여성의자리를채우려는것만이아니라국가보안법의맥락속에서‘여성’이란무엇을의미하는지,여성과남성은국가에의해어떻게구분되고구획되는지,국가보안법과맞선사회운동에서여성은어떤위치와조건에놓여있는지에대한사유를의미한다.즉역사의재해석과재맥락화를통한재의미화과정이며,이는지워진여성의역사를드러냄으로써역사를다시쓰기위한정치적기획이자여성존재를사회적으로가시화하는싸움이다.
둘째,여성의경험과사유를지식화하고언어화하는작업이다.국가보안법에의한사회적,개인적고통에도불구하고이들에대한소외와배제는필연적으로공식역사에서주변화를낳았고지식과언어에서소외를불러왔다.따라서국가보안법과관련된여성의증언을재구성하는것은여성이배제와지배를뒤엎는데사용했던언어와지식,행위에대한주목이자발견이기도하다.이렇게국가보안법의담론에서여성을살아있는존재로부활시키는과정에서그서사를통해운동사가재구성되어새로운관점과시선,새로운장르가만들어지길바란다.

국가보안법과마주한구술자들의용기있는목소리

학창시절반정부투쟁을하다가수배자가되기도했던김은혜는1981년산업선교회에서활동하던남편이체포되면서국가보안법과맞닥뜨렸다.“둘째아이가1980년6월19일생이니까갓돌이지났을때였죠.큰애는네살이었고요.그날모처럼친정에가기위해짐을챙겨기차를타러나가려는데,우리집에네명의떡대같은놈들이나타나서남편한테후배에대해물어볼게있다고하더니바로잡아갔어요.남편이그렇게잡혀간뒤기저귀가방둘러메고둘째는업고큰애는손잡고방방곡곡남편을찾으러다녔어요.”그후그는남편의옥바라지뿐만아니라남편과함께구속된사람들의석방운동을했다.당시는5·18직후라술집에서말한마디만잘못해도소리소문없이잡혀가던시절이었다.다행히남편은그이듬해집행유예로풀려났다.하지만남편만풀려난것이“마음이편하지”만은않았다.이후그는부천에자리를잡고풀무원영업,보험설계사를하면서부천에여성의전화,생협,경실련등을만들었고,지역운동도계속해나갔다.“힘들고아파도견딜수있는것은견뎌내고,내선택에책임을져야해요.돈이아니라좋은삶을사는것,좋은세상을만드는것이훨씬의미있고가치있다고생각했기때문에이런삶을선택한거잖아요.그결단에대한책임은나한테있으니불편함이있더라도감수해야죠.”
언론인이었던유숙열은1980년7월갑작스레남영동대공분실로끌려갔다.수배된김태홍기자를숨겨줬다는이유였다.취조실에들어가자수사관들은‘년’자를써가면서뒷머리를잡고욕조물에다머리를처넣었다.“계속‘김태홍어디있냐?’묻는데나는모른다고그랬지.나한테자기네가원하는대답이안나오니까‘남민전이재문이죽어나간방으로가자’고하더라고요.다른방에끌려들어갔는데방가운데줄이달린나무판이놓여있고,예닐곱명의건장한남자들이몽둥이를들고서있었어요.놀랐지.너무무서웠어요.”나중에그는자신을고문한수사관중한명이이근안이었다는사실을알게되었다.“그영상에서그사람얼굴을봤는데나를고문했던바로그수사관이었어요.소스라치게놀랐어요.그순간을잊고살려고노력했는데그사람얼굴을보는순간당시로되돌아갔어요.대공분실에서고문당했던일들이모두생생하게떠올랐어요.온몸이부들부들떨리면서아무것도할수가없었어요.”이후그는미국으로가페미니즘을공부했고,국내로돌아와페미니스트저널《이프》를만드는등여성운동을활발하게했다.현재는말하지못해기록되지않고,무시되어지워지거나왜곡된여성들의이야기를복원하는일을하고있다.“그동안여자들의목소리가안들렸잖아요.여자들의목소리가울타리를넘으면안되고암탉이울면집안이망한다는소리를우리에게했잖아요.이제여자들이말할차례고여자들이말할시대예요.”
정순녀는서울대에다니던딸이노동운동을하다구속되자민가협에가입해활동했다.그리고날마다교도소로찾아가딸을석방하라고시위를벌였다.“어느날엔가는갑자기면회가안된다는거여.우리딸을징벌방에다갖다넣었대.박종철이추모제를주동했다고말여.징벌방이뭔지도모르잖아?그래서‘징벌방이뭐요?’그러니까지하어디가서면회도못하고혼자묶여있는거래.세상에,그냥두지않고묶어놓는대.내가소장실에쳐들어가서우리딸내놓으라고소리를질렀지.소장이말도안하고도망가데.”이후그는자신의딸만을위해서활동을하는게아니라그스스로가한국사회의민주화를위해싸우는운동가로거듭났다.“우리엄마들이싸우는게학생들이싸우는것보다몇배가더쎄.우리엄마들은자식을위해서한다생각하면무서운게없거든.멱살잡고서싸울수도있고저사람을죽이라고하면죽일수도있어.학생들은그렇게못하잖아.엄마들이싸우는힘이너무좋더라고.”
김정숙또한정순녀처럼아들을위해싸우다가운동가가된경우다.김정숙은아들이학생운동을하기전에는오히려데모를하는학생들을비난하던평범한어머니였다.그는‘여자’로태어나서제대로공부도못한게제일한이라고말했다.“학교를못간게한이됐지.키워주신증조할머니도,부모님도나를예뻐해주셨지만여자는얌전히집에있다시집가면된다고배웠지.전라도골짜기시골인데도그옛날에우리작은아버지는대학교를졸업했어요.친정이교육에대한이해도있었고경제적으로넉넉한편이었지만여자라는이유로나는초등학교만다녔어.여자는자기이름만쓸줄알면된다는거지.우리동네에서여자가초등학교를간경우도많지않았어요.”그런김정숙은끊임없이세상밖으로나가려고시도했다.그리고민가협회장을맡는등그누구보다앞장서서한국사회의민주화를위해싸워왔다.“사람을보는눈이달라졌지.농사짓는친척이시커먼얼굴로우리집에오잖아요.전에뭘모를때는이웃사람이볼까봐무섭고창피하고그랬는데세상에눈을뜨니까그사람이너무자랑스러운거여.이렇게열심히,떳떳이살고있다는게보이니까.이전엔간첩잡았다고하면정말로간첩잡은줄알고‘나쁜놈들’했는데알고나서는‘저놈들또거짓말하네,사기치네.나쁜놈들’이렇게생각이바뀌었어요.누가나쁜놈인지가바뀐거지.처음에는몰랐다가나중에진실을알고나니까누구한테빨갱이라고말하는사람들이더이상사람으로안보이더라고.”
고애순은1995년12월범민련가입혐의로구속되었다.그때그는임신8개월이었다.“제가거의만삭인상태로한겨울에구속되니까밖에서어떻게든빼내려고엄청노력들을많이하셨어요.그런데집행유예기간에다시구속된상황이다보니구속적부심도안되고,보석도허가가안났어요.첫임신이다보니임신에대한지식도없었을뿐아니라교도소안에서도저를도와줄사람이없었어요.그래서많이불안했어요.그때는누가보기에도제상태가안좋았어요.”구속되고두달좀못되었을무렵급격히몸이안좋아졌다.그즈음형집행정지가받아들여져출소했지만,아이는사산되고말았다.그는이사실을지난24년동안한번도입밖에꺼내본적이없었다.“그런데국가보안법폐지운동의국면에서는운동의시기라는게있어서저를기다려주기가어렵잖아요?나는국가보안법으로봐서는피해자인게맞는데,그런내가아이한테는가해자인거잖아요?그걸극복하기가어려웠는데,그런상황에서회자되는게편치않았죠.”그뒤그는인권운동에뛰어들었다.자신처럼국가보안법으로피해를당했던당사자를돕기도하면서스스로더성숙해졌다고말한다.

한총련탈퇴서,종이한장의무게

1997년6월정부는한총련을이적단체로규정했다.그리고각대학총학생회장들과한총련간부들을수배했다.양은영도이시기에구속됐다.1심에서검사는7년을구형했고,판사는3년형을선고했다.그리고한총련탈퇴서작성을강요받았다.“제가갈등을할거라곤생각조차못했던것같은데,갈등이되더라고요.쓰면나갈수는있을것같은데어떻게하지?그런데반성문,한총련탈퇴서를쓰기에는내마음이허락하지않더라고요.억울함이너무크고,방법이너무치사했어요.”그러나그는탈퇴서를쓰지않았다.이후학생운동을정리하고대구로내려가남편과함께사회운동을시작했다.하지만전통적인가부장질서가일상을지배하는곳인대구에서여성인그가자리잡는건어려운일이었다.딸은이런그를보고‘경력단절녀’라고놀리기도했다.“이렇게말하긴그렇지만운동을하다중간에나가서기회를얻은사람들은잘도사리사욕을챙기는데,무식하게끝까지버티고있는사람들은지난삶이경력이되지도못하고역사가되지도못하고이렇게사는것같아서.우리한총련세대는민주화에기여했다고인정받지도못하고오히려사회적으로낙인찍혀살고있으니……”
1997년4월30일총학생회장이던유해정은사복경찰에게체포되어어딘지도모르는곳으로끌려갔다.당시에는몰랐지만남영동대공분실이었다.“이번에남영동대공분실에가서나선형계단을오르면서알았어요.제가그계단을올랐더라고요.앞에서누군가눈을가린저를이끌고뒤에서밀고.그때기억이온몸의신경에되살아나더라고요.”재판에서5년형을구형받았다.그러자한총련탈퇴서를쓰라고강요받았다.“교도관들도,엄마도하루가멀다하고와서재촉했어요.풀려나고싶으면한총련탈퇴서를써야한다.수감된다른학교학생회장들도다탈퇴서를썼다.탈퇴서가뭐대수냐?네마음만안그러면되지……”결국그는탈퇴서를작성했다.하지만그행위로인해자신의세계가송두리째무너지는것같은느낌이들었다고했다.“바보가됐어요.부끄러워서사람들을만날수가없는거예요.또사람들을만나도입을열수가없는거예요.자존감이높고,판단하고결정하고그것을이야기하고행하는데부끄러움이없는사람이었는데,그런내가사라져버린거예요.”그는“겨우숨만쉬고살다가”인권운동사랑방에서활동을시작했다.그는이인터뷰를하게된계기가“종이각서한장이사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