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문장을 읽고 나니 아흔 살이 됐어요 - 걷는사람 시인선 91

긴 문장을 읽고 나니 아흔 살이 됐어요 - 걷는사람 시인선 91

$12.00
Description
“이별의 말은 목이 길어요
이제 긴 목을 접고 누운 꿈속이에요”

메아리치는 다정한 속삭임의 물결
서정의 가장 큰 함정, 사랑에게로 달려드는 시(詩)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2020년 ‘김유정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강나무 시인의 첫 시집 『긴 문장을 읽고 나니 아흔 살이 됐어요』가 걷는사람 시인선 91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서정의 가장 큰 함정은 사랑”(해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시인 강나무의 온기 어린 시선이 담긴 54편의 시가 한 권의 책으로 묶인 것이다. 새로이 태어난 하나의 세계, 이곳은 서정을 메아리치는 다정한 속삭임의 물결로 가득하다.
강나무 시인이 그려내는 서정의 세계는 가히 아름답다. 가령, 이 세계에는 “나무 이름, 들꽃 이름 같은 건 모릅니다//이런 내가 시를 씁니다”(「생긴 대로」)라고 고백하는 화자가 있다. 이토록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을 간직한 주체는 생애의 감정이 가닿는 가장자리를 보듬는다. 세계의 아름다움을 살피며 끊임없이 골몰하고, 삶을 할퀴어내는 사랑과 비애의 정서를 마침내 서정으로 환원하는 시인의 모습이 “쓸 만한 기억들을 찾느라 오랫동안 머물지도 몰라요”(「중고나라」)라고 이야기하는 화자와 어렴풋이 겹쳐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까.
잔잔하지만 명랑하게, 때로는 용감한 목소리로 부드러운 노래를 이어 가는 시인의 태도는 곡선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시의 메타포와 닮아 있다. 예컨대 “나는 처음과 달리 꼬불꼬불 엉켜 있어요/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괜찮아요”라는 다짐이 “가방 손잡이는 웃고 있는 내 입을 닮았죠”(「뜨개질을 해요」)라는 결말로 이어지는가 하면, “머리는 차갑고 심장은 뜨거워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기린으로부터 포착해낸 “한자리에서 오랫동안 생각에 잠긴 사람을 보곤 해요/그들도 아주 긴 목을 가지고 있어요”라는 표현이 “이별의 말은 목이 길어요”(「안녕, 기린」)라는 궤적으로 미끄러지는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물성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곡선의 통로는 삶을 살아내는 이들을 열원하는 마음과 무관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시인 강나무가 그려내는 시 세계 속 주체들은 타자와 감정을 나누는 일에 기꺼이 뛰어든다는 점에서 찬란하다. 슬픔을 느끼는 이의 등을 바라보며 “넌 혼자가 아니야”(「판다가 벽을 보고 앉아 있다」)라고, 또 “네가 보고 싶다”(「샌프란시스코는 지금 몇 시입니까?」)고 가만히 속삭이는가 하면, “한낮의 파편들에 쓸린 상처를 서로 살피는”(「밤의 여행자」) 일에 품을 아끼지 않는다. 상처받을지언정 다시금 사랑으로 달려들고야 마는 아름다운 망각으로 가득한 시편이 모여 “뜨겁고 말랑한”(「선짓국」) 생에 최선을 다하는 모두에게 전하는 눈부신 안부로 귀결된다.
해설을 쓴 하혁진 문학평론가는 오늘날 “서정이 처한 곤경”의 맥락을 포착하는 것을 시작으로 강나무 시인의 작업이 가지는 의의를 예리하게 분석한다. 또한 “강나무의 담백한 언어는 마주한 세계를 자아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욕심이 없어서 투명하”다는 특성을 짚어 나가며 시집의 길잡이가 되어 준다.
박지웅 시인은 추천사를 통해 “그림자와 키스와 나쁜 꿈과 그리움 들은 부재함으로써 현존하는 ‘우리’인데, 이는 시인 자신이 실체적으로 또 비유적으로 관통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분절된 이름들”이라고 명명한다. 또한, “비장보다는 순정에 가깝”고, “맹세보다는 그리움에” 가까운 강나무 시인의 언어가 “비극적이지 않고 다정하다”는 점에 주목하며 그의 첫 행보에 찬사를 보낸다. 이 책을 펼친다면, “바라는 것 없이 사랑하는”(「매화나무를 감고 기다릴게요」) 우리의 태도가 틀리지 않았음을 속삭이는 서정의 언어에 흠뻑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저자

강나무

전북군산에서태어나2020년‘김유정신인문학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새얼’동인으로활동하고있다.

목차

1부가방손잡이는웃고있는내입을닮았죠
선물
생긴대로
중고나라
뜨개질을해요
장마
렛츠
깊은잠꽃
꽃무릎
별일없니?
아마존에사는조에라는원시부족은
로하는항상옳다
그렇게많은말들이필요할까
귓속말은생각보다평범해
안녕,기린

2부하루를살고우리는광안리에서죽었다
과일가게앞버스정류장
한동안
매일메일
아픈연애
다시,겨울밤
광안리·1
광안리·2
키스얼마예요?
그로부터일년후
세로가가로에게
샌프란시스코는지금몇시입니까?
매화나무를감고기다릴게요
누군가뒤로다가와당신눈을가릴때떠오를이야기

3부씹을수도없이한번에꿀꺽,
떨어지는꿈을꾸면문득한뼘이자랐다
살구비누
당신을보고오는길
흑백무지개
선짓국
판다가벽을보고앉아있다
CPR
관계없이삼백일이흐르고
밤의여행자
고백
행남자기
번지는실금도포장되나요?
잘비비는게비법이야
바다에게묻는날도있습니다

4부눈을감아도밤이환했다
집에없는시
튜링테스트
더티마리아
장벽
고난주간
아무일도일어나지않는날
시방
아프리카톰슨가젤
혀짧은여자순정씨
오늘과동전
국만있으면돼
긴문장을읽고나니아흔살이됐어요
엔딩크레딧

해설
마음이마음대로기울어질때
―하혁진(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시인의말

퇴근길지하철에서
일면식도없는사람에게한쪽어깨를내어줬다
곤한숨소리에망설이다가나도눈을감았다
시가그렇다

2023년가을
강나무

책속에서

나는처음과달리꼬불꼬불엉켜있어요
다시시작해야하지만괜찮아요
사슬뜨기의콧수를세다보면다른생각이안나요
비구름속에숨은하늘색실을뽑아네트가방을떠요
숭숭뚫린구멍들속으로팔딱거리는물고기들을잡았다가놓아준다고상상해요
빠져나가는물고기지느러미에당신의기억을달아놓아요
가방손잡이는웃고있는내입을닮았죠
―「뜨개질을해요」부분

오래골몰하느라뒤늦게나온별들이가득하고
잘가,인사가
잘자,인사로바뀌는만큼의거리를지나왔어요

이별의말은목이길어요

이제긴목을접고누운꿈속이에요
따닥따닥발굽소리를내며날개아픈새를태우고
하늘을달릴거예요
―「안녕,기린」부분

그는영화를보다가소파밑에서혼자잠들었다
갑자기늙어버린얼굴에오래전퇴화한입의흔적이옅게보였다

저녁바다에수만개의검은보자기들이출렁였다
나는날이환해질때까지보자기하나하나를집어서
우리가가보기로한산책길과헌책방,카페와밥집들을덮었다

할말이없었던건아니었다
꼭할말이있었던것도아니었다

하루를살고우리는광안리에서죽었다
―「광안리·1」부분

거꾸로되감기어때요?

장면이느리게바뀌는건이제평화롭다는얘기예요
봄여름가을겨울이삼초동안머물다간성급한결말이싫어요
뜨겁고치열했던우리이야기를단숨에
그럭저럭하고미지근한안심에맡기지말아요

겨울가을여름봄순서로다시가봐요
그로부터일년전
(중략)
그로부터지금까지그로부터나까지
시간과공간은한번에넘기는수십페이지의책장처럼
―「그로부터일년후」부분

진짜같기도가짜같기도했다
모난데없는너

뚝딱뚝딱사랑을짓느라
손에못자국이나기도했지만

연한씨앗에서몽글몽글거품으로피는살구꽃이더아려
너는내등뒤에서자주눈물을훔쳤다

옷솔기에매달린실같은기억을자르려다가서면
손사래치며큰소리로웃었고

슬픔많은네가주는사랑이
참말같기도거짓말같기도해서
나는오랜세월고개를갸우뚱했다
―「살구비누」부분

종이에그은검은줄처럼슬픔이선명하다

등뒤에그어진쇠창살들이울창하다

넌혼자가아니야

이말이간절해서모두가혼자돌아앉는다
―「판다가벽을보고앉아있다」부분

호주머니를뒤집으면
에누리없이보낸시간이수북했다

때묻은하루가은빛으로잠깐빛나기도했지만
구릿빛이더많았다

보름달이창틀에땡그랑떨어지면
눈을감아도밤이환했다

호주머니에서미처꺼내지못한것들이
세탁기속에서덜그럭덜그럭돌아갔다
―「오늘과동전」부분

책한권을아무데나펼쳐서누가글밥이많은쪽을가졌는지겨루는게임을해요.이긴사람이진사람의수명을조금씩뺏기로해요.그러다한사람의수명이다하면책을덮고완독한책의명단에죽은사람의이름을적어요.만수무강이축복인가요.긴문장을읽고나니아흔살이됐어요.있어도그만없어도그만인괄호안에들어갈시간이아직무성해요.
―「긴문장을읽고나니아흔살이됐어요」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