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말
퇴근길지하철에서
일면식도없는사람에게한쪽어깨를내어줬다
곤한숨소리에망설이다가나도눈을감았다
시가그렇다
2023년가을
강나무
책속에서
나는처음과달리꼬불꼬불엉켜있어요
다시시작해야하지만괜찮아요
사슬뜨기의콧수를세다보면다른생각이안나요
비구름속에숨은하늘색실을뽑아네트가방을떠요
숭숭뚫린구멍들속으로팔딱거리는물고기들을잡았다가놓아준다고상상해요
빠져나가는물고기지느러미에당신의기억을달아놓아요
가방손잡이는웃고있는내입을닮았죠
―「뜨개질을해요」부분
오래골몰하느라뒤늦게나온별들이가득하고
잘가,인사가
잘자,인사로바뀌는만큼의거리를지나왔어요
이별의말은목이길어요
이제긴목을접고누운꿈속이에요
따닥따닥발굽소리를내며날개아픈새를태우고
하늘을달릴거예요
―「안녕,기린」부분
그는영화를보다가소파밑에서혼자잠들었다
갑자기늙어버린얼굴에오래전퇴화한입의흔적이옅게보였다
저녁바다에수만개의검은보자기들이출렁였다
나는날이환해질때까지보자기하나하나를집어서
우리가가보기로한산책길과헌책방,카페와밥집들을덮었다
할말이없었던건아니었다
꼭할말이있었던것도아니었다
하루를살고우리는광안리에서죽었다
―「광안리·1」부분
거꾸로되감기어때요?
장면이느리게바뀌는건이제평화롭다는얘기예요
봄여름가을겨울이삼초동안머물다간성급한결말이싫어요
뜨겁고치열했던우리이야기를단숨에
그럭저럭하고미지근한안심에맡기지말아요
겨울가을여름봄순서로다시가봐요
그로부터일년전
(중략)
그로부터지금까지그로부터나까지
시간과공간은한번에넘기는수십페이지의책장처럼
―「그로부터일년후」부분
진짜같기도가짜같기도했다
모난데없는너
뚝딱뚝딱사랑을짓느라
손에못자국이나기도했지만
연한씨앗에서몽글몽글거품으로피는살구꽃이더아려
너는내등뒤에서자주눈물을훔쳤다
옷솔기에매달린실같은기억을자르려다가서면
손사래치며큰소리로웃었고
슬픔많은네가주는사랑이
참말같기도거짓말같기도해서
나는오랜세월고개를갸우뚱했다
―「살구비누」부분
종이에그은검은줄처럼슬픔이선명하다
등뒤에그어진쇠창살들이울창하다
넌혼자가아니야
이말이간절해서모두가혼자돌아앉는다
―「판다가벽을보고앉아있다」부분
호주머니를뒤집으면
에누리없이보낸시간이수북했다
때묻은하루가은빛으로잠깐빛나기도했지만
구릿빛이더많았다
보름달이창틀에땡그랑떨어지면
눈을감아도밤이환했다
호주머니에서미처꺼내지못한것들이
세탁기속에서덜그럭덜그럭돌아갔다
―「오늘과동전」부분
책한권을아무데나펼쳐서누가글밥이많은쪽을가졌는지겨루는게임을해요.이긴사람이진사람의수명을조금씩뺏기로해요.그러다한사람의수명이다하면책을덮고완독한책의명단에죽은사람의이름을적어요.만수무강이축복인가요.긴문장을읽고나니아흔살이됐어요.있어도그만없어도그만인괄호안에들어갈시간이아직무성해요.
―「긴문장을읽고나니아흔살이됐어요」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