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든 꽃잎마다 하루가 얹혀 있다

시든 꽃잎마다 하루가 얹혀 있다

$12.00
Description
박인 시인의 새 시집 『시든 꽃잎마다 하루가 얹혀 있다』는 인간이 살아가며 마주하는 탄생과 죽음, 사랑과 이별, 질병과 고통, 시간과 기억을 조용하면서도 깊이 있는 언어로 탐구한 시집이다. 「작은방」에서 시인은 자신의 탄생을 돌아보며 삶의 끝을 함께 바라본다.

엄마는 작은방에서
부엌칼로 탯줄을 끊었다

그 덕에
나는 이쪽으로 건너왔다

언젠가 나도
그 작은방에서 홀로

빛이 닿지 않는 쪽으로
조용히 나가리라
탄생을 가능하게 한 작은방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장소로 다시 등장한다. 이처럼 시인은 탄생과 죽음, 시작과 끝이 서로 맞닿아 있는 인간의 생애를 담담하게 바라본다.
표제작 「천국의 아이」에서는 한 아이의 죽음을 통해 전쟁과 폭력의 상처를 이야기한다. “시든 꽃잎마다 / 말하지 못한 하루가 얹혀 있다”는 구절에는 세상을 떠난 이들이 끝내 말하지 못한 삶과 남겨진 사람들의 기억이 겹쳐 있다. 그리고 “전쟁은 / 이미 끝났어야 했다”는 마지막 문장은 개인의 슬픔을 넘어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과 평화에 대한 염원으로 이어진다.
「나의 본적」에서는 이러한 관심이 분단과 실향의 문제로 확대된다. “나의 본적은 / 실향이 내린 뿌리”라고 말하는 시인은 머무르지 못한 사람들의 기억을 자신의 뿌리로 받아들이고, “평화가 철조망 너머에 있다면 / 나는 상처 난 몸으로도 / 그 길을 넘어가리라”고 노래한다. 개인의 상처와 역사적 상처가 하나의 시적 공간에서 만나는 것이다.
이 시집에서 몸과 시간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걷는 사람」에서 발은 “지구에 가장 먼저 닿는” 신체이며, 「병실에서」에서는 아픈 사람의 곁에 있으면서도 그 고통을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다. 「시간이 없어요」에서는 유한한 시간을 의식하면서 말을 줄이고 천천히 남은 시간을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낸다. 몸으로 걷고, 몸으로 아파하고, 몸으로 시간을 견디는 인간의 모습이 시집 전체를 관통한다.
사랑을 다룬 시편들에서는 뒤늦은 깨달음과 후회, 그리고 다시 내미는 손이 중요한 정서로 나타난다. 「겨울에 쓰는 반성문」에서 시인은 아픈 날에는 말보다 먼저 손을 내밀어야 했음을 깨닫는다. 「보내지 못한 봄」과 「돌아오지 않는 말」에서는 이미 지나가 버린 관계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바라본다. 사랑은 완벽한 행복이 아니라 상처와 후회 속에서도 끝내 누군가를 향해 마음을 내미는 일로 그려진다.
한편 「AI 붓다」, 「TV 붓다」, 「인간 붓다」에서는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AI와 기술이 인간의 지능과 언어를 대신하는 시대에도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시집 후반부의 「악기들의 은유법」은 인간의 내면을 음악의 언어로 풀어낸 독특한 연작이다. 만돌린, 바이올린, 아코디언, 첼로, 피아노, 오보에, 하프 등 여러 악기가 고독과 사랑, 기억과 희망을 표현하는 은유가 된다. 특히 「오보에」에서 오보에는 “동트는 고독의 숨결”이며 “새벽이 오고 있음을 먼저” 아는 존재로 그려진다. 크게 울지 않으면서도 다가오는 새벽을 먼저 감지하는 오보에의 모습은 이 시집이 지닌 조용하지만 꺼지지 않는 희망을 상징한다.
『시든 꽃잎마다 하루가 얹혀 있다』는 슬픔을 극복하라고 말하는 시집이 아니다. 오히려 슬픔과 상실의 곁에 오래 머물며, 그 안에 남아 있는 사랑과 기억을 바라보는 시집이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개인의 사랑에서 전쟁과 평화까지, 몸의 고통에서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까지 시인의 시선은 넓게 움직이지만, 그 중심에는 늘 한 사람의 하루와 그 하루에 얹힌 마음이 놓여 있다.
박인 시인은 거창한 해답 대신 아픈 사람 곁에 앉고, 떠난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늦었지만 다시 손을 내밀고, 아직 살아 있다면 다시 길을 걷는다. 시든 꽃잎 위에도 하루는 얹혀 있고, 그 하루를 살아낸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바로 그 마음의 흔적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다.
저자

박인